[2003/03] 오늘의 지구촌 이야기-아프가니스탄

희망까지 파괴되지는 않았다



그 많은 피를 삼키고도 메말라 흙먼지를 날리는 땅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근교에서…
- 『아프가니스탄에 피는 꽃』에서


“현대건축 예술의 극치를 보기 위해서는 카불로 가라.”
한때 동서교역의 중추역할을 했던 비단길의 중심이자 굳건히 자신들의 문화를 지켜왔던 아프가니
스탄이 지난 23년간의 내전을 통해 창조해 낸 파괴된 도시의 모습을 풍자하는 말이다. 유럽의 사
라예보 내전에서 대형 아파트와 자동차가 포탄을 막는 바리케이드로 사용돼 그 파괴된 모습이 현
대적인 음산함을 띠었다면 문명의 혜택을 비교적 받지 못했던 아프가니스탄의 파괴된 도시는 그
와는 사뭇 다른 석기시대적 기괴함으로 다가온다.
그 피폐의 카불이 지금 그곳 특유의 흙먼지처럼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 국제사회로부터 재건 비용이 유입되고 재건사업가와 국제 엔지오, 취재기자 등이 몰려들었
다. 그동안 카펫 짜는 일을 하다 작업실을 떠나 산간오지로 피신했던 노무자들, 아예 조국을 떠
나 이웃나라로 전전하며 난민으로 전락했던 인텔리 계층들, 이들 모두가 서서히 카불로 돌아오
고 있다.
험악한 기후와 지형으로 아프간 사람들은 원래부터 생활력이 강했다. 거기에 겹쳐진 내전 등은
그동안 이들에게 오직 살아 남아야 한다는 의지만 단련시켜 주었다. 이제 이들에게 날아든 종전
소식은 그 생활력과 의지가 활기차게 뛰놀 삶의 무대를 마련해 주고 있다.
지금 카불의 시장은 이란, 파키스탄 등 주변국으로부터 들어온 가전제품, 콜라, 비누 등 생활필
수품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도로에는 노란 일제 중고 택시가 질주한다. 영화관에서는 낡은 인
도 영화가 그들의 희망을 대변하고 푸른 부르카를 걸친 여성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시내를 활보
한다(여성들은 과거 남편이나 남자 친척을 대동하지 않으면 나들이를 할 수가 없었다). 암시장
엔 뭉텅이 돈이 흐른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에 일고 있는 건축 붐을 타고 남자들은 노동판을
찾고 있다. 가용될 수 있는 차량과 외국어 능력은 모두 외국인들을 위해 고가에 공급되고 있다.
통역을 맡은 지아(22) 씨는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 같다. 나 또한 지난 몇 년간은 골방에
서 아이들에게 카펫 짜는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 만족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외형적으로 보이는 카불의 모습이다.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는 이곳에는 그러나 많은 문
제가 산적해 있다. 오랜 내전과 전쟁을 겪은 땅이니 만큼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필자가 아프간으로 입국하기 전 파키스탄 국경 토르캄에서 만난 난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온통 흥분되어 있었다. 작년 겨울부터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의 중재로 약 40만명
내지 60만명의 난민이 아프간의 고향으로 이미 돌아갔다. 이들을 고향으로 보낼 때는 5인 가족
을 기준으로 할 때 100달러의 생계비와 6개월의 식량을 지원해 준다. 문제는 고향으로 돌아간
뒤 정착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비옥했던 땅은 지뢰밭으로 변해 쓸모가 없고 몸을 누일 집들
은 철저하게 파괴됐다. 기대와 꿈에 부풀어 찾아간 고향 땅 아프간 내에서 많은 사람들은 또다
시 새로운 난민생활을 해야 하는 형편이다. 귀국 난민들의 대부분은 인근 파키스탄에서 열악한
생활을 해온 막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영구 귀국자들이다. 물론 인근 국가에서 사업을 벌여 성공
한 사람이거나 인텔리 계층도 귀국 대열에 끼여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프간 내에서 새로운 사업
을 벌여 한탕 해보려는 사람들로 귀국자라기보다는 임시 방문자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해외에서의 난민생활을 접는 사람들은 그래도 일단 돈이 흐르는 수도 카불로 대부분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카불 외곽에는 새로운 난민촌이 형성되고 있다. 내전으로 파괴된 외곽지역에 버려
져 있는 집들을 보수하여 새로운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불안한 미래, 뜨거운 교육열
오랜 싸움으로 지치고 파괴된 아프간 사회에서 그나마 희망적이면서도 인상적인 것은 이들의 교
육열이 엄청나게 높다는 사실이다. 지구촌 어느 곳에 내놓아도 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해 한국을
무색케 하는 정도가 아닌가 싶다.
난민들이 모여든 빈민촌에는 정식학교가 없다. 어린이들은 무너진 회교사원에 마련된 임시 학교
에서 공부한다. 카불 외곽의 한 빈민촌 임시학교에서는 약 600명의 어린이들이 땅바닥에 벽돌
한 장씩을 의자 삼아 공부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칠판은 무너진 건물 벽이
었다. 이곳에서는 18명의 선생님이 매월 약 7만원 정도의 급료를 받고 일하고 있었다. 그 중 11
명은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이후 복귀한 여자 선생님들이었다. <한국이웃사랑회>와 함께 이곳 교
육 프로그램의 지원을 위해 방문했을 때 우리는 사비를 털어 전교생들에게 각각 노트 한 권과 연
필을 전달했다. 한국 돈 13만원으로 가능했다. 100달러의 즐거움! 그때 행복해 하던 아이들의 모
습을 잊을 수가 없다.
대학생들의 학구열도 결코 어린이들에 뒤지지 않는다. 특히 카불대학에서 목격한 장면은 매우 인
상적이었다. 대학 내 취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던 중 멀리 떨어진 대학 캠퍼스 숲속에서 서성이
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옛 철학자들의 사색이 저랬을 거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모든 학생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한결같이 작은 노트 하나
가 전부였다. 책이라는 것이 없다보니 강의 시간에 교수가 말하는 내용을 필기한 것이 그들에게
는 곧 책이었다. 재정리하고 기록해 둘 종이가 모자라 학생들은 강의 내용들은 그날그날 그대로
암기해야만 했다. 카불대 의대 4학년 하마드(26) 씨는 “지금 아프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 또한 그렇다. 불안한 미래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공부 외에 대안이 없다”라고
말했다.

소아마비 등 전쟁 후유증 극심
전쟁 후유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지뢰문제다. 아프간에는 현재 약 3
억4천만평방미터의 땅에 지뢰가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하루 평균 3명의 지뢰 피해자
가 발생하고 있다. 이와 함께 탈레반 시절의 억압과 내전 중 폭격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
람도 허다하다.
외부세계의 사람들이 미처 잘 모르고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전쟁후유증은 수많은 어린이들이 소
아마비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탈레반 정권시절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만 남기고 모든 엔지오
를 추방하면서 소아마비 백신 부족사태가 발생, 소아마비가 창궐했다. 지금은 <유엔아동기금
(UNICEF)>과 ICRC가 연간 3회 예방주사를 실시하고 있으나 더 많은 국제사회의 노력이 절실히 요
구되는 상황이다.
극심한 인플레도 카불이 당면하고 있는 화급한 과제다. 유엔군, 유엔기구 사람들, 국제 엔지오,
외국기자단, 해외 기업가 등 많은 외국인들이 몰리면서 집값과 생필품값이 오를 대로 올라 있
다. 시내의 경우 2층집 한달 임대료가 최고 2500달러에서 5천달러 수준. 이런 가격 상승 현상이
벌어진 데는 홍보성 이벤트나 한 건 취재를 위해 단기간 이곳을 방문했던 엉터리 엔지오 등의 소
행이 한몫 했다. <한국이웃사랑회> 이병희(29) 간사는 “우리처럼 이곳에 베이스를 두고 장기적
인 활동을 하는 엔지오에게는 힘든 조건이다. 사진 몇 장 찍고 간 엔지오들이 물가만 올려놨다.
이런 점에서는 회의적인 면도 많다”고 한탄한다.
크게 볼 때 아프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건축, 도로, 통신 등의 인프라 구축이다. 전세계
의 수많은 민간 기업체들이 대형 사회간접자본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업들
은 국제적 힘의 논리에 의해 결국 이러저러한 모양으로 그간 아프간에 다리를 걸쳐놓았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강국들에게 안배될 가능성이 높다.
파키스탄에 진출해 있는 한국의 여러 기업들도 아프간 시장공략을 위해 노력 중이나 아직까지는
회의적인 반응이 더 크다. 현재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사무소를 개설하고 카불에서 활동 중
이다. KOICA 카불 사무소 책임자 김상태(47) 부장은 “보건과 의료, 농촌개발, 도로 관련 사업
등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현정부가 임시정부의 성격인 데다 관리체계가 아직 미약하
고 고위관리들도 정확한 정책방향을 세우지 못하고 있어 어려움이 많다. 한국정부가 4500만달러
를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 만큼 철저한 사전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곳에 2년 6개
월 체류조건으로 파견되어 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아프간에 절대 필요한 것은 그들 스스로 정치적 안정을 찾는 것이다. 외부의
힘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국가가 탄생되었지만 그들의 통합된 의지에 의해 이제부터 어려움을 하
나하나 극복해 나가야 한다. 많은 외국 기업들을 끌어들여 새로운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해
야 한다. 그리고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푸른 부르카 속에 숨겨 있는 우리네 어머니들 같은 강인
한 생존력이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벗지 못하는 여성들
의 부르카에서 평화는 여전히 불안하게만 느껴진다. 정치적, 종족적, 종교적 허울로부터 하루 빨
리 자유로워져 지금은 부르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여성들의 화려한 단장과 순박한 모습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

글·사진 / 성남훈 np-sung@hanmail.net
다큐멘터리 사진가. 프랑스 사진대학 이카르포토 졸업, 1992년 루마니아 집시 사진으로 ‘르 살
롱’전에서 최우수상 수상, 프랑스 라포통신사 기자,
『르몽드』, 『리베라시옹』, 『타임』 등의 잡지에 기고활동, 주로 분쟁지역과 난민을 중심으
로 ‘소외된 사람’들에 천착하고 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2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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