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0] 특집 핵발전/ 원자력 포기 이후 독일의 새로운 에너지 정책 / 이필렬

특집-핵발전, 되풀이되는 악몽

원자력 포기 이후 독일의 새로운 에너지 정책
이필렬/방송통신대 교수, 과학사


독일의 원자력 발전 포기 결정은 국민들의 활발한 원전 반대운동과 높은 환경 의식의 결과
이다. 1980년대초 원자력을 철저하게 반대하는 녹색당이 독일의 정당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원자력 발전에 대한 독일 정당들의 태도는 모두 ‘유보없는 찬성’이었다. 86년 체
르노빌 사고 후 사민당은 원자력반대로 당론을 확정했지만, 98년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 전
까지 원자력 발전에 대한 독일 정부의 공식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89년 재처리시설 건설 포기와 91년 3월 고속증식로 포기 후 독일의 원자력 산업계와
정치권 내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희망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물론 92년 리우회담을 계기
로 지구온난화가 중대한 문제로 대두되자 독일 원자력 산업계는 이를 재도약의 기회로 삼고
원자력 발전의 대대적인 확대를 다시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원전을 바라보는 사민당 및 녹색
당의 시각과 국민 정서는 바뀌지 않았다.
결국 98년 9월 총선에서 승리한 사민당과 녹색당은 연정 협상 과정에서 원자력 포기를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확실하게 못박았다. 연정 합의서에는 ‘원자력 이용은 가능한
한 빨리 끝맺으며’, ‘핵에너지 이용의 중단은 이번 회기 안에 되돌릴 수 없도록 광범위한
법률에 의해 규정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를 위해 정권 인수 후 1백일 내에 원자력법을
개정하고, 두번째 단계로 정권 인수 후 1년 내에 전력회사들과 새로운 에너지 정책, 원자력
중단을 위한 절차, 핵폐기물 문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고, 세번째 단계로 전력회사에 대한
손해배상 없이 원자력 이용의 중단을 규정하는 법률을 내놓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또한
가장 첨예한 쟁점의 하나인 핵폐기물에 대해서는 재처리를 거치지 않고 땅속 깊은 곳에 영
구처분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에 대해서는 원자력 발전의 즉각 포기를 주장하는 환경단체들도 반발했지만, 전력회
사측은 그들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만큼 거세게 반발했다. 이들은 법적, 경제적, 기술적 측면
에서 모든 상정 가능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원자력 포기가 많은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
장했다. 전력회사들의 이같은 반발은 정부의 결정을 되돌리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
다. 그러나 이들은 원자력 포기가 독일 의회에서 결정되었더라도 국제법에 저촉될 수 있고,
소유권 침해 소지를 지니고 있어 경제적으로 엄청난 비용을 유발하며, 수만명의 실업자를
발생시킬 수 있음을 크게 부각시키려 했다. 그리고 정치권과 여론의 동요를 이용해 원자력
포기의 구체적인 실행을 가능한 한 연기하려는 것이다.
사실 독일에서 새로운 원전에 투자할 것을 고려하는 전력회사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70년
대와 80년대에 정부의 다양한 지원을 받아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기존의 원전은 오래 가동
하면 할수록 이익이 남기 때문에, 정부와의 협상에서 원전의 총 수명을 가능한 한 길게 잡
으려는 것이다.
독일 정부와 전력회사들 사이의 협상은 처음부터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사민-녹색당
정부가 2000년부터 재처리를 금지하기로 결정하고, 녹색당 출신의 환경부장관이 ‘원자로
안전 및 방사선보호 위원회’를 원자력업계쪽에 가깝다는 이유로 해체하는가 하면, 원전 운
영을 더 어렵게 만들 원자력법개정안을 내놓음으로써 전력회사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재
처리 금지는 몇몇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발전소
안의 사용후 핵연료 저장 수조가 거의 가득찬 원전에서는 그것을 재처리 명목으로 프랑스나
영국으로 보내지 못할 경우 새로운 저장고를 마련할 때까지 발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기 때
문이다. 이 경우 총 19개의 원전 중에서 1년 안에 6개, 그 다음 1년 안에 또 6개가 문을 닫
아야만 한다. 그러면 원자력 이용 포기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지만, 원자력 산업계에서 이
를 그대로 받아들일리가 만무했다. 당연히 업계와 원전 노동조합에서 거세게 반발했고, 그러
자 총리 슈뢰더가 나서서 이를 무마하는 역할을 맡아 원자력 업계와의 비공개 회의에서 이
들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슈뢰더는 전력회사들의 거센 반발이 밀려오자 이들과 만나 “원자력 포기를 다시 포기”하
는 것이나 다름없는 약속을 해 주었다. 그는 이번 임기 동안 단 하나의 원전도 정지되지 않
을 것이라고 확언했고, 원자력법 개정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슈뢰더의 측
근이자 경제부장관인 뮐러는 99년 6월 전력회사 대표들과 가진 비밀 회담에서 원자로의 수
명을 35년으로 하고 수명을 다한 원자로는 폐쇄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르면 현 정부
의 임기가 끝난 후인 2003년에 가서야 처음으로 원자로 하나가 폐쇄되고 2024년에 마지막
원자로가 폐쇄된다. 환경단체와 녹색당에서는 이 합의에 대해 즉각 반발했고, 환경부 장관은
99년 8월 그에 대응하는 안으로 최대가동 연한을 25년으로 하고 이에 따라 현 정부의 임기
가 끝나는 2002년까지 6기의 원자로를 폐쇄한다는 내용의 문건을 내놓았다. 9월 말에 가면
정부와 전력회사간의 최종 합의안이 나올 것인데, 여기서는 환경부장관의 안보다 경제부장
관의 안으로 기울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에너지시스템의 전환
1998년 말에 사민당과 녹색당에게 정권을 내줄 때까지 원자력 발전에 대한 헬무트 콜 정부
의 공식 입장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콜 정부가 에너지시스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을 가로막기만 한 것은 아니다. 헬무트 콜 집권 기간 중 연방정부에서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대를 위해 수행한 일로 가장 중요한 것은 ‘1천 지붕 프로그램’과 ‘전력매입
법’의 제정이다. 콜 정부 집권 기간인 98년 4월에 발효된 새 에너지법은 전력공급 지역독
점체제를 깨고 전력시장의 자유화를 가져왔는데,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변화지만 시장 자
유화가 에너지시스템 전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
이다.
‘1천 지붕 프로그램’은 태양광 발전을 장려하기 위한 것으로 90년부터 92년에 걸쳐 수행
되었는데, 비록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하지만 독일의 태양광 발전시설의 증가에 상당
히 기여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2천2백50여개의 새로운 태양광 발전시설이 들어섰
고, 전체 용량은 5.5 MW로 늘어났다.
‘전력매입법’은 풍력 발전시설을 급속히 는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법이 제정
되기 전까지는 개인 소유의 풍력발전기나 소수력발전시설에서 생산된 전기를 전기회사에서
매입하지 않거나 매입한다 해도 아주 낮은 가격을 지불했기 때문에 재생가능에너지를 이용
하는 발전시설에 대한 경제적 유인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력매입법이 제정되자 풍력과
태양광 전기의 가격이 1kWh당 약 17페니히로 책정되었고, 이는 비록 태양광 발전 비용을
만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것이지만 풍력 발전의 비용은 그런대로 만족시키는 수준이
었기 때문에 풍력 발전 시설의 급속한 증가를 유발했다. 이에 따라 독일의 풍력발전 설비용
량은 90년부터 95년까지 해마다 두배씩, 95년부터는 해마다 약 40%씩 증가하여 현재 독일
은 풍력발전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한편 새 정부에서는 올 99년 초부터 태양광 발전 확대를 위한 ‘10만 지붕 프로그램’을 도
입하여 실행에 들어갔다. ‘10만 지붕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면 독일에는 태양광
발전용량이 3백MW나 증가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대형 원전 하나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용량이지만, 97년 독일의 전체 태양광 발전시설 용량 34MW에 비하면 엄청나게 증가한 양
이다.
새 정부에서는 또 앞으로 ‘전력매입법’을 개정하여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5% 한계를 없
애고, 재생가능에너지와 열병합 발전이 우선적 위치를 점할 수 있도록 에너지법을 개정하며,
에너지 효율과 절약을 높일 수 있도록 각 부문의 에너지 관련 규정을 개정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환경부 장관은 이러한 에너지 전환 노력을 통해 2010년까지 전력생산 부문에서 재생
가능 에너지의 비율을 현재의 5%에서 10%로, 일차에너지 중에서의 비율은 2%에서 5%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 2050년까지 그 비율을 50%로 늘리는 것도 실
현 가능하다고 본다.
전력시장 자유화는 이제 원칙적으로 누구나 전기를 팔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므로, 재생
가능 전기 생산자와 공급자들도 부분적으로 활력을 얻게 되었다. 수십개의 재생가능 전기
판매회사가 생겨났고, 요금은 더 내지만 이들 회사로 전기 공급선을 바꾸는 가정도 늘어났
다. 그린피스는 ‘전기 바꾸기 캠페인’을 시작하여, 가격이 20% 더 비싸지만 기후변화도
핵사고도 유발하지 않는 전기로 바꾸자는 내용의 엽서를 독일 전역에 보냈고, 시민들은 엄
청난 관심을 보여 4월 현재 6만명이 전기를 바꾸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전력시장의 자유화가 에너지시스템 전환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만은 아니다. 지자체에서 설
립한 지방공사 중에서 직접 전기를 생산하여 공급하는 곳에서는 자유화로 인해 지방공사가
망해 간다고 주장한다. 지방공사들은 대형 전기회사와 달리 이윤추구가 주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열병합 발전이나 재생가능 에너지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시장 자유화 이후 대형
전기회사들이 덤핑 요금으로 지역의 소비자들을 빼앗아가면서 지방공사들이 크게 타격을 입
게 된 것이다. 지방공사들은 앞으로 사정이 더욱 나빠질 것으로 예측한다. 왜냐하면 지금까
지는 대형 전기회사들이 큰 고객만 빼앗아갔지만 앞으로는 각 가정에도 손을 뻗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방공사는 설 자리를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적 세제개혁과 에너지세 도입
시장에서의 가격은 일반적으로 ‘생태적 진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생태계에 손상을 많
이 입히는 상품일수록 시장 가격과 ‘진짜 가격’ 사이의 격차가 크다. 이 격차를 단순하게
표현하면 상품 생산과 사용으로 인해 유발되는 환경훼손을 복구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지
금까지 이 비용은 상품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부담하지 않고 사회 전체가 부담했다.
‘생태적 세제개혁’이란 시장가격이 생태적 진실을 반영하도록 조세제도를 개혁함으로써
환경 악화를 저지하고 더 나아가서 산업국가의 고질적인 문제인 구조적 실업까지 해결하려
는 것이다. 생태적 세제개혁의 핵심은 노동의 비용을 낮추고 에너지 가격을 높일 것이다. 소
득세를 낮추어서 인건비를 줄이고 에너지세를 도입해 에너지 가격을 높이면, 세수는 전체적
으로 변하지 않고 따라서 경제에 추가 부담이 생기지도 않는다. 그러면 기업체에서는 값이
싸진 인력은 더 쓰지만 값이 오른 에너지는 덜 쓰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고용의 증가와
환경질의 향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독일의 정당 중에서 생태적 세제개혁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당은 사민당과 녹색당이었으며
98년 총선에서 승리하고 연립정부를 구성한 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에너지세 도입을 위
한 법안 준비에 들어갔다. 이 법안은 연방의회와 연방상원의 동의를 거쳐 99년 4월 1일부터
발효되었다.
이번 의회임기 동안 에너지세는 세 단계에 걸쳐 인상되는데, 첫 단계로 자동차용 기름에 대
해서 리터당 6페니히, 난방용 기름은 리터당 4페니히, 가스는 킬로와트시당 0.32페니히의 에
너지세가 결정되었고, 전기에 대해서는 킬로와트시당 2페니히의(심야전력은 1페니히) 에너지
세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예외규정을 적용하여 아
주 낮은 에너지세를 적용되도록 하였다. 또한 열병합 발전시설에 대해서는 연간 70% 이상
가동될 경우 ‘1차에너지 이용 효율을 높이기 위한 유인을 주기 위해’ 석유세를 완전히 면
세하기로 결정했다. 두번째 단계는 2000년 1월부터, 세번째 단계는 2001년 1월 시행이 예정
되어 있다. 그러나 시행 일자와 인상폭에 대해서는 사민당과 녹색당 사이에 아직 상당한 견
해 차이가 있다.
독일의 원자력 발전 포기와 에너지시스템 전환을 위한 정책은 아직까지 구체적인 성과를 내
놓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원자력 발전 포기는 슈뢰더 총리의 대폭적인 양보로 환경 단체들
이 우려하듯 서서히 추진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에 따라 재생가능에너지에 기초한 에너지시
스템으로의 전환도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속도는 독일 정부의 의지
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전력시장 자유화,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축, 생태적 세제개혁의 속도,
다른 유럽연합국과의 관계 등의 변수에 따라 달라지기도 할 것이다.
또한 많은 시민단체와 개별 시민들의 활동, 압력, 구체적 실천도 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전환이 얼마나 빨리 또는 얼마나 서서히 이루어질 것인가는 여러가지 변수의 작용
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원자력 발전 포기와 재생가능에너지 이용의
확대가 독일사회에서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
소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독일에서의 에너지시스템 전환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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