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삼척, 반핵 깃발 나부끼는 길 위에서

동해·삼척
반핵 깃발 나부끼는 길 위에서


글·사진 이성근 (사)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 (사)걷고싶은부산 사무처장 kfems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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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시 들머리는 강릉 도직해변과 잇닿아 있는 동해휴게소를 기점으로 한다. 거기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이 망상동 심곡에 유배 와서 지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며 노래한 시조비 하나 서 있다. 약천은 2년 정도 강원도에 머물다 갔지만 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그 길을 따라 걷는다. 꽃은 피었지만 흥이 없다. 대신 일본 후쿠시마 폭발이 일으킨 방사능 비와 바람의 공포가 길에 깔렸다. 망상에서 노봉해안 4킬로미터, 사람 없는 백사장에 ‘원전입국 가능한가’라고 썼다. 파도가 버럭 화를 내며 몰려와 쓸어버렸다.


영동선이 7번국도와 나란히 동무하여 지난다. 대진항을 지나 대진굴다리 사거리에서 대진등대, 까막바위로 이어지는 약 3킬로미터의 해안순환도로를 탄다. 까마귀가 새끼를 쳤다는데서 유래한 까막바위는 10미터 높이의 괴석이다. 서울 남대문의 정동방이라나. 그 옆에 호국(護國)문어상이 있다. 조선 중엽 왜구의 노략질에 맞서 싸우던 의로운 호장(이장)이 중과부족으로 죽어 거대한 문어로 변해 왜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묵호 등대로 오른다. “묵호는 집집마다 번쩍번쩍 일어서는/ 파도 하나씩 키우고 살았다/ 아무리 소금을 뿌려도 펄펄 살아나는 가난/ 그 가난의 욕지기 집집마다 넘쳐도/ 애비 에미 그들의 새끼는 / 툭 툭 불에 튀는 소금이었다/……/ 묵호는 대책없이 달려드는 모든 사내들에게/ 천국이고 지옥이었다” (정영주의 『아버지의 도시 1』 중) 이쯤에서 가수 이미자의 『눈물의 묵호항구』가 나왔다. 1976년 가을 울릉도 근해 대화퇴어장에서 조업을 하던 어선 41척이 조난을 당했다. 이중 19척이 침몰되거나 실종되면서 400여 명의 사망 실종자가 발생하는 참사가 있었다. 그때도 기상청을 원망하는 소리가 자자했다. 비참한 사실은 해경에 구조되어 생환했던 대다수의 선원들은 그 악몽의 바다로 다시 출항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야속한 묵호항이라 했다. 남편 배 소식 없고 망망한 동해바다 바람소리 파도소리에 한이 쌓였다고 했다. 묵호의 산동네, 예컨대 논골이며 산제골 토째비언덕은 그런 사연이 골목마다 고여 있다. 풍랑을 피하고 바람을 피해 산위로 길을 내고 지붕을 얹었던 마을, 모든 길은 서로 연결되어 묵호항으로 향했다. 삶의 길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로서 이별과 배웅이 있던 길이지만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묵호는 1941년 일제의 석탄자원 수탈을 위해 만들어진 항구였다. 이보다 오래된 지명의 유래는 오이진(烏耳津) 또는 새나루로 불리다 조선 순조 때 이 마을을 덮친 큰 해일로부터 마을을 구제하기 위해 조정에서 파견된 이유응 부사가 속지명에 더해 물도 검고 물새도 검으니 묵호(墨湖)라는 새 이름을 지으며 지명으로 고착화 됐다. 하지만 이 묵호도 1980년부터 동해시로 바뀌었다.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의 통합이었다. 


추암으로 향한다. 북평공단을 끼고 한참이나 걸어야 하는 길이라 힘들다. 막상 추암해변에 도착하면 힘든 길 걸어온 값을 제대로 보상받는다. 이곳의 촛대바위 해돋이는 애국가의 배경장면으로 등장할 만큼 유명한데 삼척의 해금강이라 부른다. 한명회도 이곳을 ‘물결 위를 가볍게 걸어 다니는 미인의 아름다운 걸음걸이’에 비유하여 능파대(凌波臺)라 격찬했다. 철조망에 둘러싸인 해암정(海岩亭)은 1361년(고려 공민왕 10년) 중앙 정치무대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한 심동노(沈東老)가 세운 정자로 건축이란 마땅히 저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여기선 추암해변이 남한산성의 정동방이라는 설명을 꼭 한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지긋지긋한 서울 중심주의, 뚝 떼어 동해에 던져버리고 싶다.  


추암은 동해와 삼척의 경계다. 두 도시가 추암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동해시로 보았을 때 추암마저 삼척으로 넘겨줬다면 묵호 말고는 마땅히 볼 게 없는 해안이다. 그런 만큼 주변을 단장하는 노력이 크다만 자칫 넘치느니 못하다는 우려를 자아낸다. 삼척해변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정상과 정하동을 지나 오십천 하류 성내동 죽서루(竹西樓)로 향한다. 오십천은 삼척시 도계읍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삼척시를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드는 감입곡류 하천으로 발원지에서 동해에 이르기까지 50여 회를 돌아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협곡의 끝 카르스트 지형에 송림 우거진 곳에 들어선 죽서루는 1275년(고려 충열왕 1년) 두탁산에 은거하던 이승휴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관동팔경 제1경인데다 보물 제213호에 더하여 2007년 국가명승 28호로 지정됐다. “진주관(삼척) 죽서루 오십천 흘러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라며 송강 정철은 죽서루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입지 자체도 뛰어나거니와 겹처마 팔작지붕 정면7칸 측면 2칸의 건축물 자체도 아름답다. 눈여겨 볼 것은 1층 17개의 기둥 중 9개가 자연석 위해 그대로 들어서 높낮이가 제각각이다. 일명 ‘그랭이 기법’으로 암반에 상처를 내지 않고 초석을 세운 것으로 자연과의 조화미를 중시했던 전통건축의 백미다.


삼척시 곳곳에 핵발전소 찬반 현수막이 즐비하다. 맹방해변 방향 고개길로 들어선다. 한치고개를 내려 선 다음 승공교 굴다리로 빠져나와 상맹방으로 간다. 한치고개에서 하맹방해변 마읍천 하류 덕봉산까지는 6.6킬로미터. 근덕면 덕봉대교 옆에 1998년에 세워진 한국 반핵주민운동의 기념비로서 삼척원전백지화기념비 소공원이 있다. 사실 덕산은 핵폐기장 후보지 중에 한 곳으로 지난 1982년부터 핵발전소 건설 후보지 때부터 20년간 시끄러웠던 곳이다. 지역발전이란 미명으로 주민을 현혹하던 핵발전소 논쟁은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터지면서 역전되고 있다. 한번 터지면 그 어떤 발전도 소용없다는 것을 다시금 자각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욱이 삼척은 1983년 진도 7.7의 지진과 높이 5.5미터 해일로 국내 최초의 해일 사상자까지 발생한 지역이다. 동해가 더 이상 지진과 해일로부터 결코 안전하지 못한 곳임을 삼척의 역사는 웅변한다. 핵발전소라니, 가당찮은 소리다.   

 
마읍천을 따라 대진교까지 8킬로미터 굽이굽이 걷다 보면 사라재 아래 양지바른 언덕배기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두 왕자, 그리고 그들을 보필하던 시종들이 묻힌 공양왕릉이 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1394년(태조 3년) 공양왕 삼부자를 이곳 근덕면 궁촌리로 귀양 보내고서도 불안해서 4월17일 모두 죽였다고 한다. 사래재란 지명도 본래는 ‘살해치’로 왕과 시종위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이 살해된 곳에서 유래한다.


궁촌에서 남쪽 초곡으로 향한다. 바르셀로나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고향으로 국위를 선양한 체육인에 대한 배려치고는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란하다. 다행히 해변은 큰 변화 없이 아담하고 이쁘다. 솔숲 레바이크 철길을 따라 걷다 고개를 굽이굽이 돌아 서면 동해 제1경의 용화바다가 펼쳐진다. 이 길이 삼척 수로부인길이다. 삼척과 울진의 경계마을인 고포리까지 이어진다. 용화 장호해변은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울 만큼 수려하다. 한마디로 미항이다. 걷는 맛이 절로 나는 삼척의 해안길은 원덕읍 갈남리에서 해신당공원에서 민망한 얼굴이 된다.  동해안에서 유일하게 남근숭배민속이 전해지는 곳이다. 옛날 바다에 총각을 빼앗긴 처녀 애랑이 물에 빠져 죽은 뒤 고기가 잡히지 않자 처녀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남근을 깎기 시작했는데 그 전통이 요즘도 이어지고 있다. 주렁주렁 굴비엮음 같은 것에서 십이지신상에 장승모양 등 가지각색이다.  너무 자세히 보면 오해를 받는다. 흘깃 볼일이다. 임원항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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