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12] 갯벌·철새·늪/ 까마귀 귀 모양의 섬, 오이도/ 제종길

우리 갯벌 둘러보기 7
까마귀 귀 모양의 섬, 오이도


갯벌 연구자들 가운데 오이도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에게는 낯선 이름
이 아니다. 오이도가 패총이 많은 곳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오이도는 이제 육지의 일부
이다. 지금은 시화호 방조제 북단에 위치한 시흥시에 속한 지역이지만, 과거에는 육지와 동떨어
진 작은 섬이었다. 그것이 일제시대에서부터 시작된 몇 차례의 간척과 매립으로 육지와 연결되었
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섬이 있던 자리와 육지 사이는 염전지대였으며, 자연적인 갯벌의 모습
을 주변에서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에도 경인지역에서 유명하였던 오이도 횟집 마을을 찾아가려
면 염전 사이로 난 좁은 도로를 털털거리며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횟집들은 섬의 남쪽 가파
른 경사면에 있었는데 전망도 좋았고, 좁고 굽은 골목길을 따라 내려 걷는 것도 이곳을 방문하
는 재미 중에 하나였다. 이제 이곳은 도로를 내기 위한 공사로 다 사라져 버렸고, 섬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던 마을 중심지도 주택폐기물 단지가 되어 거의 허물어졌다. 이 곳에 새 주택단지
가 설 계획이다.

작은 오이도와 많은 패총
오이도(烏耳島)라는 이름은 한자가 가지고 있는 직접적인 의미처럼 섬의 모양이 마치 까마귀 귀
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주민들은 말한다. 그러나 조선 세종 때 오질애(吾叱哀), 그리
고 성종 때는 오질이도(吾叱耳島)로 불리다가 정조 때에 이르러 지금의 이름으로 된 점으로 보
아 이름에는 다른 사연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오이도의 생김새는 특이하다. 찌그러진 별
불가사리 모양이라 할까? 다섯 방향으로 지형이 돌출한 형태이며 돌출한 곳들 사이는 약간 안쪽
으로 함입되어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의 지명도 재미있는데, 안말은 주민들이 큰 마을
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그리고 웃살막, 가운데살막, 뒷살막, 똥섬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사
전에서는 살막은 어살막의 준말이고, 어살막은 어살을 쳐 놓고 물고기가 걸리기를 기다리려고 지
어 놓은 움막으로 되어 있다. 어살은 나뭇가지나 돌을 갯벌에 둥글게 놓아 물이 들고 나는 조석
현상을 이용해 어획을 하는 일종의 어구이다. 오랜 옛날부터 이곳에서 어업이 성행하였고, 어살
을 지키려고 있었던 살막에 작은 마을이 들어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쪽 경사면 횟
집이 있었던 곳이 가운데 살막으로 불렸다.
섬 전체가 패총이라고 할 정도로 오이도에는 많은 패총이 발견되었다. 1960년대 처음으로 패총
의 존재가 확인된 이후에 1980년에 첫 학술조사가 있었다. 시화지구개발사업이 진행되던 1997년
에 수행되었던 지표조사에서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되어 지금까지 모두 일곱 군데에서 패총
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와 석기, 골기가 출토되었다. 토기는 포탄모
양으로 밑으로 뾰족하고 받침이 없다. 현재 발굴이 되고 있는 뒷살막 패총에서는 주로 굴 껍데기
가 많고 다른 유적이 적은데 서해 도서지방에서 흔히 발견되는 형태라고 한다. 굴 외에는 피뿔고
둥과 백합의 껍데기가 확인되었으며, 패총이 있는 곳은 굴을 까던 곳으로 추정하였다. 발굴조사
자료에 따르면 유물의 종류로 보아 패총 발굴지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로 보이며, 가운데 살막
패총의 경우 연대 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약 3천년 것으로 판정되었다. 즉 신석기 후기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갯벌 주변의 바위에서 굴을
따 생활하였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갯벌지역의 삶이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길목에 서 있었던 갯벌
오이도는 시화 내만과 소래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지정학적으로 뱃길을 통해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배들을 살피기에 좋은 곳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 초기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일
찍부터 요충지대로 인정받고 있었다. 현재에도 해안선을 지키는 군부대가 위치한 것도 이곳의 군
사적인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다. 경기만에서 한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바로 오이
도 앞을 지나 내륙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어종이 서식하기에 적
합한 해안환경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일대는 해상운송과 수산업이 발달하고 취락이 형
성되기 좋은 여건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여건은 옛 시흥이 큰 고을로 발전하는 데
에도 적지 않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1910년대 후반에 제작된 지도에 따르면 이미 이 당시에는 육지와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아주 가
까운 거리에 있는 옥구도가 1922년에 방조제가 건설되었고, 1931년에 비로소 육지와 연결되었다
고 하니 아마 1920년대에 간척사업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던 육지화 사업
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아마 간척사업 이전에도 간조 때 이 두 섬은 갯벌로 육지와 연결되었
거나, 얕은 수로만 있어 쉽사리 걸어서 건널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갯벌이었던 곳은
모두 염전으로 바뀌었고, 이 소금 만드는 사업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가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오이도 서쪽을 사각형으로 매립하여 신시가지를 만들었다. 그
리고 옛 마을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그 마을들도 함께 사라졌다. 이제 옛 사람들의 흔적은 패총뿐
이다. 이 마저도 주택단지 마련에 없어질 뻔하다가 지역주민들의 강력한 항의로 겨우 일부가 유
지하게 되었으며, 그제야 재발굴조사가 시작되었고, 이 일대는 선사유적공원부지가 되었다.

마지막 갯벌을 지키며
시화호 방조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일대는 갯벌에서 어로행위가 활발했던 곳이었다.
수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던 탓에 갯벌에 모래성분이 많았고, 가운데살막과 뒷막살이 있었던 곳
에는 예쁜 백사장이 있었다. 모래가 섞인 경기만 갯벌에는 동죽이 많았는데 오이도갯벌도 그러하
였다. 이곳의 생산량은 송도갯벌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 패총에 동죽 껍데기가 거의 없는 것으
로 보아 5천년 동안 갯벌의 형태나 퇴적물 조성이 일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수산물이든
대량 생산되는 종은 그 지역의 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동죽도 그런 것 같다. 겨울
에 회로 먹는 동죽 살은 이 주민들에게는 아직 최고의 바다 음식인 것이다. 살짝 데쳐 양념에 버
무려 먹기도 하고 동죽을 주재료로 하는 전통음식이 적지 않다. 그래서 잔칫집에는 동죽요리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동죽은 너무 많이 생산되었고, 조미효과가 약간 떨어져 가치가 바지락 등 다른 조개에 비해 상대
적으로 낮았지만, 생산지 주민들로부터는 사랑을 받았다. 동죽으로 만든 음식은 어떤 고급요리보
다 대우를 받았다. 이런 사실에서 환경과 사람의 삶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이곳에서는 예전과 비교해 동죽이 거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송도나 새만금지역처럼 다른
주요 산지도 없어질 처지에 놓여 있어 수백년, 어쩌면 천년 이상 갯벌지역 주민들의 입맛을 만족
시켰던 전통음식과 그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이다. 자연의 지속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개
발은 환경 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까지 파괴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주변의 갯벌매립과 새 거주지로 이주를 동의하였던 주민들은 이제야 갯벌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
는 것 같다. 없어진 다음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세상의 이치처럼. 개발사업이 진행되면
보상비 분배 등 각종 해안개발사업의 부작용으로 전통마을 공동체가 해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
다. 오이도의 경우는 어촌계를 중심으로 이런 문제를 비교적 잘 극복하여 불행한 문제가 발생하
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민들이 옛 마을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고 갯벌에서 벗어난 삶에서
일종의 공허함을 느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갯벌 일이 일한 만
큼 큰 수익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일생 동안 해온 일을 저버릴 수 없어 자주 갯벌로 나선
다. 지게에 조개를 가득 잡아 갯벌을 나와 아스팔트길을 건너 집으로 향하는 노인의 뒷모습에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지금도 오이도 주민들은 간척사업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다. 오이도 남쪽 해안과 시화호 방조제
북단 사이에 만의 모습을 유지한 곳이 있다. 방조제공사 이후 펄이 쌓여 이전의 갯벌과는 꽤 달
라졌고, 그전만 못하지만 해안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면 여전히 다양한 수산물을 쉽게 채취할 수
있다. 간조 때가 되면 외지인들이 몰려와 조개를 채취해가지만 오이도 어촌계에서는 말릴 수가
없다. 주민들은 어업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저지할 법적 권리가 없기 때문
이다. 시흥시에서는 이 곳을 매립하려 하고 있고 이미 허가도 받아 놓은 상태이다. 그러나 오이
도 사람들은 이전과는 달리 어촌계를 중심으로 매립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이 반대에는 사라
질 뻔한 패총이 지켜졌던 것처럼 지역주민들의 삶을 유지시켜 왔고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주었던
갯벌이 더 이상 없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바램이 서려 있을 것이다.

글·사진/제종길 jgje@kordi.re.kr
건국대학교 생물학과와 서울대학교 해양학과를 나와, 호주 디킨대학교에서 해양환경학으로 박사
후 과정을 이수하였다. 현재 한국해양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2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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