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홍어와 옹관을 낳은 영산강 _ 정유진



건물을 지어올리고, 길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덤을 파는 것, 죽음을 파헤치는 것이다. 나주시 반남고분에 올라 지상에 떠 있었을 3미터짜리 옹관을 그려본다. 참으로 거대한 상상력이다. 2000년 전 죽음의 신이 지배하는 둥근 제국, 이곳의 시간은 다른 템포로 흐른다. 무덤 안쪽으로만 흐르는 영원의 시간은 영산강물만큼 유장하고 무심하게 후텁지근한 오후를 지나간다.

강과 인간
인간이 맨 처음 삶터로 꾸민 곳은 물이 있는 곳, 곧 물섶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강에 관한 기억은 인간의 뼈에 새겨진 원체험이 아닐까. 강은 물고기를 품듯이 대대로 인간을 먹여 살린 유구한 모성이다. 영산강은 호남 문화의 발상지로 문명이 싹튼 고대의 강처럼 호남 사람들을 품어왔다. 물길을 따라 물고기는 움직였을 것이고, 물고기들을 따라 배가 왔다갔다했을 것이며, 그 배로 경제와 문화 또한 넘나들었을 것이다. 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는 과연 부유했다. 예부터 강물과 바닷물이 만난 곳의 물고기는 맛있다고 알려졌다. 나주지방의 경우, 예부터 물산이 풍부해 팔진미가 있었는데, 영산강에서 잡히는 맛있는 물고기는 따로 어팔진미로 삼았다고 한다. △영산강이 조수 왕래할 때 조금물 또랑참게 △몽탄강 숭어 △영산강 뱅어 △구진포 웅어 △황룡강 잉어 △황룡강 자라 △수문포 장어 △복바우 복어 따위라고 한다.

영산강의 시원지는 담양의 용소이고 하류는 목포에 닿는다. 밀물때면 바닷물이 광탄까지 거슬러 올라오는 영산강에 언젠가 왕건이 타고 다니던 배의 파편이 발견됐다 하여 이 일대가 떠들썩해진 일이 있었다. 배의 파편으로 추측한 배의 규모는 800톤급이었으며 그를 바탕으로 수역도를 그려본 결과 지금의 영산강 폭의 일곱 배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산강은 길이 115.5킬로미터고 유역면적이 3371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담양 ·광주 ·나주 ·영암 등지를 지나 영산강 하구둑을 통하여 황해로 흘러드는 거대한 강으로 1977년까지 배가 다녔다. 고작 30년이 흘렀으나 영산강의 화려했던 과거는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분명 남도 최대의 포구였다.

1934년 영산강가의 제방과 다리공사를 그린 이석성의 「제방공사」란 단편을 보면 “십이월-겨울날은 몹시도 치웠다. 이 땅에도 암방에 속타는 ×군의 ×강에 가설하는 인도교와 제방공사에-그렇치 않아도 다소간 번화를 자랑하는 하한인-선창거리와 공사지는 날마다 흥성흥성하게 번잡하였다. (…) 물화의 집중과 차마의 교통이 번잡하고 일상 수십척의 범선과 삼척의 발동선이 머므르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강변에 서 있는 등대
영산강은 나주에 이르러 영산포라는 포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세곡을 거두어 보관하여 서울로 운반했던 중간 물류창고였는데 『경국대전』에 이르기를 영산포 물류창고인 영산창에는 800석을 적재할 수 있고 선박 53척이 배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1897년 목포 개항 이후에는 증기선이 들어오곤 했는데 목포에서 영산포까지는 약 4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영산포에는 영산포 등대가 홀연 서 있는데 등대는 누가 뭐래도 바다의 상징. 우리나라 유일의 강변 등대인 영산포등대는 1915년에 설치된 것으로 영산강의 화려했던과거를 쓸쓸히 증언한다.

얼마나 많은 배들이 몰려들었으면 등대를 다 세웠을까. 홍어 주산지인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들이 배에 실려 영산강 뱃길을 따라 일주일 여를 올라와 이곳에 닻을 내리면 홍어는 먹기 좋게 발효되어 예의 ‘썩은 홍어‘가 되었다. ’홍어의 거리’라고 쓰인 등대 주변거리는 한산했고, 즐비한 홍어집들의 아낙들은 칠레산 홍어를 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포구와 어물전 특유의 생기는 찾아볼 수 없고 쇠락한 강과 낡은 등대가 스산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누정과 가사문학
이 지역은 영산강과 다도해가 어울려 농경문화와 해양문화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곳이다. 잘 발달한 농경문화로 인해 일제의 식민지 침탈이 극심했던 곳이기도 하며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 교역으로 인해 내륙의 농경문화와는 다르고 섬이 갖는 해양문화와는 또 다른 독특함이 살아 있다. 유난히 흙과 물이 좋고 물자가 풍부했던 이곳은 자연과 벗삼은 정취, 풍류가 깃든 걸출한 ‘남도 문화’를 낳았다. 남도 문화는 누정(누각과 정자), 시, 글, 그림 등의 선비문화와 함께 서민들의 판소리를 꽃피운 것으로 유명하다. 영산강 주변의 누정에는 유명한 식영정, 소쇄원을 비롯한 536개의 누정이 있다.

반남고분군
영산강 일대의 나주 반남고분군은 여행지로 유명하다. 반남은 매우 여성스런 느낌을 주는데 사방을 둘러싼 부드러운 황토와 멀리서 보면 서로 분간하기 어려운 낮은 구릉, 그리고 흩어져 있는 고분들이 갖는 유려한 곡선 때문이다.

경주나 부여·공주의 유적에 익숙한 사람들, 그래서 남한의 고대 유적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가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은 영산강 유역의 반남이란 작은 면 일대에 산재한 고분(古墳)들을 본다면 커다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산재한 40여 기의 반남 고분군은 한국 고대사에 남겨진 최대의 비밀이다. 이곳에 묻힌 사람들이 누구인가(마한 사람이라는 설도, 아니라는 설도 있다)와 큰 규모의 옹관을 제조한 기술은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지역이 백제 영토였으니 부여·공주의 고분보다 작으리라는 예상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일단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예를 들어 덕산리 3호분의 경우 무덤의 남북 둘레가 46미터, 높이가 9미터에 달한다.

고분들은 드러내거나 감추면서 이제는 소멸되고 없는 강과 함께한 인간의 역사를 상징한다. 이 지역은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토기문화가 발달했는데 제사용 토기를 분석했을 때 고기나 나물이 아닌 가재미, 멸치를 젯상에 올렸으며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 바닥엔 물고기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만큼 이 일대는 영산강을 빼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강과 어우러진 삶이라는 얘기다. 400~500년에 걸쳐 형성되는 고분은 연인원 3천 명이 3개월 이상 일해야 고분 1기를 만들 수 있었다. 고분에 묻힌 사람들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만 이 정도의 규모라면 왕에 버금가는 엄청난 부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이 반남고분군은 매장 방법도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다. 거대한 하나의 봉토 내에 수 개 혹은 수십 개 이상의 시신을 담은 옹관(항아리관)이 합장돼 있는 것이나 몇몇 고분 조사에서 밝혀지고 있듯 봉토 주위에 도랑이 존재했던 점도 특이하다. 0.5톤이나 되는 옹관을 만들고 이렇게 큰 고분을 여러 기 남겼다는 것은 이 지역의 부와 수준 높은 문화를 반증한다. 여름 잡초 훌쩍 자란 고분은 개울처럼 변한 영산강처럼 애잔한 느낌을 준다.



강과 함께 살기 위하여
커다란 강이 새끼강을 거느리듯 영산강은 강을 중심으로 한 찬란한 남도 문화를 낳았다. 사람들은 강변 주위로 조개처럼 모여 추운 강바람을 등지며 고기를 잡아올리고 기름진 땅에서 곡식을 거뒀을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기반으로 한 고대의 삶은 건강한 강의 생태 위에서 건설되고 유지되는 것이었다. 강과 함께 살아온 고대인들의 경제는 환경적으로도 지속가능한 생태경제였다. 인간과 강은 서로를 존중하며 흘러왔던 것이다.

오늘날 강은 더 이상 인간과 생사고락을 함께하지 않는 처치 곤란한 무엇이 되고 말았다. 자연 착취를 바탕으로 한 근대경제는 댐을 세우고 제방을 만들어 본래의 강의 모습을 왜곡시켰고, 결국 독극물에 가까운 산업폐수에서 좌변기의 오물에 이르기까지 산업문명의 온갖 쓰레기를 받아내는 시궁창으로 전락시켰다. 강의 몰락은 사람살이의 생태성 또한 몰락시켜 삶의 모습 또한 굴절되고 얼크러지고 말았다.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영산강의 검은 강물을 보라. 강을 회복시키는 일은 생태적인 삶을 회복시키고, 강과 인간의 공생계를 새로이 여는 일임에 틀림없다. 남도의 젖줄 영산강이 강으로서의 위엄을 하루빨리 되찾길 바란다.


글 / 정유진 기자 jungyj@kfem.or.kr
사진 / 이성수 기자 yegam@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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