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재숙 생의 마지막까지 현역이었던 활동가를 기억하며

고 최재숙 에코생협 상무이사 ⓒ함께사는길 이성수
 
순직이었습니다. 그이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활동 현장에 있었습니다. 지난 12월 1일 오후 3시 45분, 에코생협 산하 8개 매장 실무책임자 미팅이 시작될 참이었습니다. “가슴이 아파!” 스르르 눕듯이 그이는  쓰러졌습니다. 회의 주재자를 잃은 이들이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차에 오를 때까지도 의식이 있었지만, 이송 중 맥박이 멎었습니다. 이송된 병원에서 심폐소생 시술을 받았으나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1962년 6월 28일생, 향년 58세. 공해추방운동에서 시작하여 시민환경운동으로, 다시 생협운동으로 시민운동의 영역을 넓혀온 ‘생의 마지막까지 현역’이었던 활동가가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고 최재숙 에코생협 상무는 1991년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창신동 골목길, 작은 빌딩에 세 들었던 공추련은 반공해·공해추방운동에 뛰어든 최초의 직업 활동가 조직이었습니다. 온산공단의 참혹한 공해와 이로 인한 인체 피해를 폭로하고 주민 보상과 치료, 이주대책을 이끌어내고 낙동강 페놀 오염을 부른 기업에 책임을 묻고 정부가 유역 단위 광역수질대책을 세우도록 이끌었던 공추련의 활동 속에 고인이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만들어진 정보와 현장의 무기가 될 정보를 정리하고 만드는 일, 만들어진 정보를 갈무리하는 일이 그이의 담당 업무였습니다. 아니, 사실 공추련에 딱 나누어진 업무 분장은 없었습니다. 모든 활동가가 모든 활동을 함께 했습니다. 그저 그이는 정보를 모으고 갈무리하고 활용하는 게 조직과 활동에 필요한 일임을 알고 그 일을 자기 일에 추가했을 뿐이었습니다.
 
1993년 고인은 공추련이 환경운동연합으로 거듭날 때 창립 멤버로 참여했습니다. 공해 추방을 넘어 ‘시민 참여로 사회와 자연의 건강성을 지키는 시민운동’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2년 세계는 브라질 리우환경회의를 계기로 ‘국경을 넘는 시민환경운동의 연대’가 필요함을 알게 됐고, 낙동강 페놀오염 등 전국을 뒤흔든 환경문제를 겪으며 전국을 무대로 삼는 시민환경운동에 대한 요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환경운동연합의 창립과 동시에 고인은 ‘자료정보실’ 책임자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이는 종로구 누하동 251번지, 마당 넓은 집의 1층에 놓인 키 높은 서가들을 사랑했습니다. 갈색 목재 서가 선반마다 고인의 손으로 정리된 ‘시민환경운동의 역사가 될 자료들’이 날마다 다른 색인을 달고 늘어났습니다. “디지털화된 정보의 힘이 곧 운동의 힘이 될 것”이라고 그이가 힘주어 건설을 주장하고 스스로 책임자를 겸직했던 시민환경단체 최초의 ‘정보센터’도 만들었습니다. 누하동 251번지에서 가장 늦게 꺼지던 불빛은 늘 서가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작은 몸으로 가장 큰 성실성으로 일하던 사람이 그이였습니다.
 
 
환경운동연합이 생활환경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 운동을 펼칠 조직의 건설에 관한 논의를 시작한 것은 환경운동연합과 시민사회가 동강댐 건설 백지화를 이룬 2000년의 일이었습니다. 고인은 기존 업무 외에 새로운 생활환경운동을 펼칠 조직의 건설 실무책임자가 되었습니다. 2년의 준비 끝에 2002년 10월 17일 환경운동연합 전문기관, ‘에코생활협동조합(이하 에코생협)’이 창립총회를 열었습니다. 두레생협연합회의 일원이 된 에코생협의 상무이사로 취임한 그이는 열정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에코생협 창립과 동시에 자체 브랜드의 친환경 공산품을 만들어 생협 매대에 올리고 주문발송에 의한 판매를 통해 먹거리 위주 생협 매장의 풍경을 바꾸었습니다. 누하동 251번지 종로매장 하나에서 시작된 에코생협은 매장의 수와 조합원의 수를 꾸준히 늘려갔습니다. 2020년 현재 에코생협은 서울과 지역에 6개 매장 1만4688명의 조합원을 둔 생활환경운동 조직으로 거듭났습니다. 
 
고인은 에코생협이 소비자 조합원의 편익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영업이익이 나면 “우리는 생활환경운동조직이다, 생산자 조합원의 생산기반 마련에 투자하자.”거나 “환경운동단체들을 지원해야 생협운동도 발전한다.”며 에코생협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만들었고, 시장에서 유기농 열풍이 불어 상대적으로 생협들이 힘들어질 때도 “우리는 물품만 팔지 않는다, 그게 우리 경쟁력이다.”라며 생협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에코생협은 환경운동연합과 연대하여 ‘사회적 약자를 위한 김장 나눔’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시민참여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했고, 무엇보다 2002년 창립 이후 일관된 ‘폐기물 감량 캠페인’을 전 매장에서 강도 높게 진행해왔습니다. 포장재 감량을 위해 과일과 곡류의 무포장 소분 판매를 가장 빨리, 가장 높은 수준에서 실시했고, 생협 내 조합원 활동가들, 그리고 환경운동연합 여성위원회와의 콜라보를 통해 ‘비닐봉지 대신 장바구니 들기’를 꾸준히 펼쳤습니다. 또한 ‘플라스틱 포장재 프리 특판전’ 등 환경공익을 생각하는 활동을 에코생협의 기치이자 활동 기조로 만들어왔습니다. 그 모든 활동의 기획자이자 지휘자로서 그이는 헌신했습니다. 
 
 
고인은 생활환경운동조직으로서 생협운동이 나아갈 두 개의 지향은 ‘조합원의 삶 자체를 친환경으로 바꾸는 일’ 그리고 ‘사회적 돌봄 조직으로 생협 조직의 확장과 심화’라고 보았습니다. 친환경 생활을 꿈꾸는 시민들을 위해 그이는 활동과 깊은 자기 학습을 통해 얻은 정보와 지혜를 정리해 두 권의 저서(『친환경으로 키우는 우리아이』, 『친환경 음식백과』)를 펴냈습니다. ‘사회적 돌봄’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던 때부터 그이는 ‘조합원이 서로의 능력으로 서로 돕는 활동’을 구상하고 이를 생협이 사회적 기업으로서 추진해야 할 ‘임무’로 보고 실천에 나섰습니다. 2016년 에코생협은 과천 ‘바오밥’ 그리고 군포의 ‘엄마친구네’와 컨소시엄을 이뤄 ‘지역 아이 돌봄 서비스’를 진행했습니다. 당시에는 정부사업이나 민간기업의 영리사업으로만 존재하던 ‘돌봄 사업’에 생협이 최초로 진출한 사례입니다. “이익보다 사회적 필요에 주목한 사업이었고 이후 사회적 돌봄 경제에 생협이 안정적으로 진출할 노둣돌을 놓는 일”이었다고 추경숙 ‘바오밥’ 대표는 회고합니다. 2017년 에코생협은 총회에서 조합원 활동 부문의 최우선 사업으로 ‘돌봄 서비스’ 사업을 공식화했습니다. 당시 고인은 이 사업 의제를 조합원들에게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협은 이제 물품에서 서비스로 사업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가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요구가 여기에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이의 사회적 연대활동은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약자를 위한 연대자로서의 자각에 기반합니다. 2003년 여성환경연대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자신이 속한 모든 자리에서 여성의 권익을 실현하기 위해 진력했습니다. 서울과 중앙의 환경운동연합, 우리동네햇빛발전협동조합 등 집행위원과 감사로 참여한 환경단체에서 여성 활동가 권익 증진을 위해 발언하고 행동해왔습니다. 사실, 그이 자신이 30년간의 선도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여성 차별을 허무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12월 1일 3시 45분. 구급차에 오르며 그이는 후배에게 생의 마지막 말을 했습니다. “마스크 쓰고 가야지, 가져다줘….” 지켜야 할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생명의 가치, 삶의 가치, 생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단 한 순간도 활동 현장을 떠나지 않고 30년을 헌신했던 활동가였습니다. 공해를 추방하는 것이 시대의 요구였던 시절 그 현장에서 활동했고, 시민환경운동이 시대의 요구였던 시절 그 현장에서 활동했으며, 생협운동이 시대의 요구였던 시절 그 현장에서 한결같은 열정으로 활동한 시민운동가였습니다. ‘생의 마지막까지 현역’이기를 바랐던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의 선배, 고 박영숙 선생님을 삶과 활동의 사표(師表)로 삼았던 이 활동가는 생이 저문 지 보름여가 흐른 12월 17일, ‘2020 박영숙 살림이상’ 생명 분야 수상자로 호명되었습니다. 
 
고 최재숙 동지의 명복을 빕니다. 활동의 현장에서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고이 가소서! 
 
글 / 박현철 편집주간 parkhc@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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