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길의 사랑 14]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날 오후 파주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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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천의 가을볕이 눈부시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 덮인 겨울 날. 8살 당시 국민학교 1학년 꼬마는 하얗게 눈 덮힌 초가집들과 야트막하고 둥글둥글한 산들을 보며 굽이진 길을 걸어, 읍내로, 서울로 갔다. 12살 더 먹은 언니 손을 꼭 잡고서. 몰랐다. 놀러가는 게 아니라 아주 살러가는 것인 줄은. 그리고 서른을 넘겨서야 고향 마을을 다시 찾았다. 어머니가 환갑이 다 되셔서 고향으로 되돌아 가셨던 것이다. 어머니를 만나러 오는 길. 파주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였던 고향마을은 인천에서 자동차로 1시간 40분이나 걸렸다. 그 길에서 작은 새를 움켜쥔 채 물을 차고 튀어 오르는 솔개를 만났다. 나 어려서 내 닭을 물어갔던 그 놈을. 

 

그때로부터 또다시 20년이 흘러갔다. 나는 지금, 꼬부랑 할머니가 되셔서 이제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시느라 가끔은 너무 귀엽고, 가끔은 예상 못한 사고를 쳐 속을 뒤집어놓으시는 여든 여섯 ‘엄마’가 사는 곳에 와있다. 마을 한가운데 연못이 있어 ‘못말’이라 불리는 내 고향마을은 남쪽을 제외한 동, 서, 북쪽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텃밭들과 계단식 논 세 개 그리고 7가구에 빈집 하나 있는 작은 마을이다. 버스는 왕복 하루 열 대도 안다닌다. 비오는 여름날이면 집안에 앉아서 맹꽁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고, 봄부터 가을까지 집안에 앉아 곤충조사가 가능하다. 겨울이면 텃밭에 나가 각종 산새를 보고, 밤중에 3분만 걸어 나가면 잠자러 온 기러기들이 시끄럽게 울어댄다.      

 

인천에서 계양산 골프장 반대싸움을 마무리 지으면서 파주환경연합 일을 시작하게 되어 어머니의 인생 후반 여정에 추억을 함께 나누는 호사를 누리게 됐다. 그것도 8살에 떠나갈 때 그대로인 고향마을에서. 어머니의 귀향 이후 당신을 만나러 오는 길은 언제나 한강하구와 임진강을 따라 달리는 자유로였다. 늘 북쪽을 보며 달렸다. 맑은 날 넓은 북쪽 하늘은 나를 환장하게 만들었고 문산 당동IC를 빠져 나오면 나도 모르게 운전대를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좌회전해 반구정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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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이 세운 임진강 변의 반구정

 

황희 정승이 임진강 변에 세운 정자가 반구정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여길 찾는 건 아니다. 반구정에서 보는 임진강 풍경이 늘 그립기 때문이다. 밀물 때는 꽉 찬 물길이 좋아서, 물이 빠졌을 때는 강펄의 빛깔과 그곳에서 한가로이 졸거나 먹이활동을 하는 새들이 보고파서, 낫 모양으로 굽어지는 넓은 강물 너머 드넓게 펼쳐진 장단반도 초지에 가슴이 확 뚫리는 그 시원함 때문에, 나는 틈만 나면 반구정에 가는 것이다. 반구정에서 보는 풍경들 중에서도 최고는 이 가을 오후의 빛깔이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과 사이사이 웃자란 자주색 물피가 서쪽 하늘을 넘어가는 햇살 속에서 역광을 받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황금빛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시각이 임진강 물이 반쯤 빠진 때라면 강펄에 반사된 은갈색 빛깔이 또 환상적이다. 그때 강펄에서 먹이활동을 하거나 졸고 있는 기러기들은 반 고흐도 표현하지 못할 그림일 것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풍광이 연출되는 곳은 DMZ의 가장 서쪽 아랫녘으로,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파주 임진강 전체가 서부 DMZ 일원 민통선 남쪽 경계선 안을 흐른다. 그런 탓에 늘 철책 안을 흐르는 슬픈 강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방조제나 갑문으로 입이 틀어 막히는 수모를 당하지 않은 채 자유로이 서해로 흘러가는 지복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임진강은 북한 관할의 강원도 마식령에서 발원해 그쪽 민간인통제구역을 통과한 뒤, UN사 관할인 DMZ를 거치고, 남한 관할인 남쪽 민간인통제구역으로 접어든다. 북녘에서는 남쪽 방향으로 급물살로 흐르고 남녘에서는 서쪽으로 급히 방향을 틀어 흐름이 완만해진다.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에서 한강을 만나 김포와 황해도 개풍군 사이 저어새의 고향땅 ‘유도’ 앞을 지나 서해로 흘러든다. 거기는 NLL수계다. 엄밀히 보면 임진강은 국가하천이 아니라 남, 북 두 개의 국가와 UN사령부 관할을 통과하는 국제하천이다. 그러니 ‘장단반도에 항구를 짓겠다’, ‘남북이 뭐시기 하는 뭔 공단을 짓겠다’ 하는 자치단체장이나 정치인들의 공약은 파주시민들을 현혹하는 실현불가능한 헛공약일 따름이다. 

 

임진강은 한강 수계에 포함된다. 하구의 모양새가 한강하구와 꼭 닮은 하천이 임진강과 만나기 직전에 한강이 품은 강, 공릉천이다. 한강하구가 김포대교 아래 수중보 때문에 바닷물이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듯이 공릉천은 영천배수갑문에서 더 이상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한강 김포수중보 하류가 장항습지와 산남습지, 시암리습지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듯이 공릉천도 영천배수갑문 아래는 그곳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갈대와 물억새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에 밀물과 썰물의 영향으로 펄콩게와 말똥게가 어울려 논다. 제방길 넘어 넓게 이어진 사람들의 밥상, 송촌벌판은 수원청개구리의 최대서식지 중 한 곳이고 금개구리도 사는 개구리들의 천국인 동시에 이들을 노리는 파충류와 새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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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는 출판도시, 헤이리마을, 모방송국전원마을, 교하•운정신도시 등 첨단신도시와 시골 전통마을이 공존하는 곳이다. 굽이굽이 비포장 길과 쭉쭉 뻗은 자유로와 제2자유로가 공존하고 추가로 서울문산간민자고속도로, 제2외곽순환도로 등을 더 만들겠다고 하는 곳이다. 이미 망가진 것을 복원하는 것보다 막아 내고 지켜야 하는 게 더 많은 곳이다. 판문점이 있고 개성공단으로 가는 길목이기에 남북관계의 변화 때문에 세계 유일한 분단 국가로서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하고 위협을 받기도 하는 곳이다. 그래서 파주는 늘 평화를 소망하는 도시라고 믿는다. 분단의 상징인 철책선 안으로는 생명을 품고 흐르는 임진강과 한강하구가 있어서 더 슬프고 아름다운 땅이다. 여기서 더도 덜도 아닌 나이 오십 즈음에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활동을 다시 시작한 나는 행복하다. 파주는 내 치유의 처소다.

 

글 노현기 파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paju@kfem.or.kr  

사진 이성수 기자 yegam@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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