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6월호] 수필/고집쟁이 농사꾼 전우익

수필 - 깊은 산 속의 고집쟁이 농사꾼 전우익

[월간환경운동 1997년 6월호]

◈ 신경림 / 시인

봉화에 살며, 시종 농사짓는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 농사꾼 전우익.
그러나 그의 농사 이야기에는 큰 우주가 있다.
현암사에서 펴낸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에는
여기에 옮기지 못한 그의 이야기들이 있다.

내가 전우익선생과 처음 만난 것은 70년대초, 유신체제가 한참 독이 올랐을 때다.
“인사동 근처의 한 출판사 사무실에서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는 의자에 앉는
대신 내내 바닥에 쭈굴트리고 앉아 있었다. 버릇이 되어 그것이 더 편하다는 것이
었다. 그것으로 나는 그가 그때까지 어디 있다가 온 것인가를 짐작했고 또 그 얘
기를 들으려고 여러 가지로 유도성 질문을 했지만, 그는 농사꾼으로 자처하며 시
종 농사짓는 얘기밖에 하지 않았다. 그때 한 얘기 중에서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
한 말이 있다. “일 중에서 창조적인 것은 농업밖에 없으니더. 상업은 있는 물건
팔고 사는 거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공업도 있는 것을 가지고 모양과 용도만 바
꾸는 거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기라. 농사야 아무것도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 아닙니껴.”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닐지라도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그는 친지의 결혼식 축의
금 대신 늘 책을 사서 선물한다고 했는데, 그 선물하는 책 속에 내 시집이 가장
중요한 품목으로 끼어 있다는 소리도 반가웠지만, 당장은 돈이 더 좋겠지만 시간
이 지나고 나면 책선물이 더 고맙게 생각될 것이라는 촌스러운 발상이 오히려 신
선했다. 이후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져, 서울에 오면 그는 대개 연락을 했고, 있
는 데로 나가면 당시에는 금서였던 재일 사학자나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저작 또는
노신의 소설이나 시집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고는 했다. 직접 농사한
것이라며 배낭에 율무나 밤콩을 둬됫박씩 짊어지고 오는 일도 있었다. 물론 무공
해 농작물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내세우지 않았다. 스스로 무공해 농사를 짓지만,
농약에 비료가 뒤범벅이 된 농작물을 다 먹고 있는데 몇만 안 먹어 무슨 소용이냐
는 것이었다. “혼자만 건강하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그래서 그는 식당에 들어
가도 다른 반공해주의자들과는 달리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음식이 처
치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마디 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먹을 필요가 있나? 좀 간단하게 먹고 덜 먹어도 될긴데.” 더욱이 그는 먹다 남은
음식이 버려지는 것을 못 견뎌했다. “저걸 만드느라고 얼마나 고생들을 했는데.
세상에 쓰레기만 더 불리다니.” 한 번은 함께 거리를 걷게 되었다. 가로수 정비원
들이 큰 나무를 자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나무를 함
부로 다뤄. 나무도 다 영이 있는 건데. 백 년도 못 사는 사람한테도 영이 있는데
몇백 년을 사는 나무한테 어떻게 영이 없겠어요.”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그동안 사귀면서 보니 아무래도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나무와 풀인 것 같았
다. 길을 가다 말고도, 들판을 지나다가도, 또 산엘 올라가면서도 그는 종종 말한
다. “저 나무들을 보세요. 나무를 보면 사람이 하는 일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알 것 같아요. 나무나 풀은 쓸모 없는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꽃은 벌한테 꿀을
만들게 하고 또 열매를 맺어 먹거리가 되고 가지는 부러져도 사람한테 땔거리가
되어 주고, 썩으면 땅을 기름지게 만들고.”
그래서 그는 나무나 풀을 구경하러 각처를 다닌다.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소백산

등 명산도 찾아다니고, 야산과 들판도 돌아다닌다. 바닷가도 가고 강에도 가고, 광
릉 수목원, 청량리 임업시험장, 비원, 창경궁도 가본다. 최근에는 나무와 풀의 이름
과 성질을 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청계천에 나가 식물도감까지 구했다. 그는 농
업만이 참으로 창조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만이 창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과 동물은 소비만 하고, 식물만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다”는 것이 그의 나무와 풀에 대한 철학이다.
그가 나무와 풀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으로부터 세상살이의 이치를 배
우고 사람 사는 도리를 깨닫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무와 풀은 그의 스승인 셈이
다. 함께 단양의 적성산성엘 갔을 때, 그는 누렇게 빛이 바래 머지않아 떨어질 잎
들을 잔뜩 달고 있는 상수리나무와 자작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나무 좀
보세요. 춥고 먼 길을 가자니까 될 수 있는 대로 간편한 몸가짐을 해야겠어서 잎
을 다 떨쿼버리는 걸 말예요. 사람한테는 왜 저런 지혜가 없을까요.”
그가 나무를 깎고 다듬어 책상이며 걸상이며 필통 따위 간단한 가구와 도구를 만
들기 시작한 것은 꽤 여러 해째, 나무가 좋아서임은 말할 것도 없다. 깎고 다듬는
다고 하지만 가능한 한 제모습이 남아 있도록 손을 덜 대는 것이 그의 특유의 공
법이다. 가령 책상 같으면 알맞은 높이로 나무토막을 자른 것인 경우가 많고 필통
은 겉은 손을 대지 않은 채 썩은 속을 후벼낸 것이 더 명품이 된다. 옹이도 대개
살린다. 옹이야말로 그 나무의 향이 가장 짙게 배어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렇
게 만든 물건들을 그는 이곳저곳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 준다.
나무로 만든 물건을 쓰고 있으면 그 나무로 된 물건한테서 나무의 영이 사람한테
로 옮아온다고 그는 생각한다. 나무가 가진 좋은 정신, 깨끗한 기운을 사람이 얻게
된다고 믿는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로부터 얻은 물건 중에는 필통도 있고 앉을게
도 있지만 쓸모가 없는 나무토막도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거기 앉고 놓고 글
을 쓰고 하는 것만이 쓸모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무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쓸모
이상의 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인 것 같다.
그는 느티나무, 소나무, 대추나무 등을 좋아하지만 따지고 보면 싫어하는 나무가
없다고 말한다. 어떠한 나무든 나무껍질은 사람의 피부보다도 부드럽고 향기는 무
엇에도 비할 수 없다는 것이 항용하는 그의 고백이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나무
만 보면 문득 쓸어안고 싶어진단다. “내가 왜 나무를 일찍 몰랐는지 모르겠어요.
다시 태어나면 나무를 키우고 공부하는 사람이 돼보고 싶스니더.” 그는 몇 해 전
부터 지금 살고 있는 봉화에서 직접 수유의 씨를 뿌려 묘목을 내어 심는 일을 했
다 한다. 3년도 못 되어 노란 꽃이 피고 여름이면 짙은 초록빛 잎으로 덮이고 가
을에는 또 빨간 열매로 치장하는 것이 여간만 신기하지 않더라고 나무의 신비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했다.

무얼했다고 쓰레기까지 냉기니껴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전우익선생이 나무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은 사실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그가 나무를 깎아 무엇을 만드는 것도 다 남을
주기 위해서기 때문이다. 나무로 무엇을 만드는 일 외에 그는 부들로 자리를 매기
도 하는데 이 자리도 다 남을 주기 위해서 맨다. 농사도 자기 먹는 것 조금 남기
고 모두 남에게 준다. 틈만 나면 그는 허름한 가방에 나무로 만든 필통이며 추수
한 콩이나 율무나 팥 따위를 넣어 가지고 해남으로 광주로 대구로 서울로 돌아다
닌다. 그가 찾아 다니는 사람 가운데는 법연, 명진, 현기 같은 스님도 있고, 정호
경, 유강하 같은 신부도 있고, 신영복, 김진계 같은 출소 장기수도 있고, 정영상 같
은 해직교사도 있고, 권정생, 이현주 같은 동화작가도 있고, 김광주, 이철수 같은

화가도 있고, 김용택 같은 시인도 있고, 염무웅, 정지창 같은 교수도 있고, 찾아가
면 주경야독하라고 꼭 책을 사주는 종로서적 이철지 같은 사장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는 이들을 찾아 다니는 까
닭을 “찾아가면 밥도 먹여 주고 잠도 재워 주니까”라고 농으로 말하기도 하고,
“만나면 참 배울게 많아요”하고 진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거꾸로 배운다는 개념
에 있어 그는 다른 사람과 같지를 않다. 그는 다섯 살밖에 나지 않은 손녀딸 언년
이한테서도 많은 것을 배운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어떤 때는 그 어린 것이 세상을
더 바르게 알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있다. “모두들 가르칠라꼬만
들지 배울라곤 안해요. 나무한테도 그렇고 짐승들한테도 그렇고 아이들한테도 그
렇고 배울게 얼마나 많은데요. 전 자리를 맨 지 10년이 되는데, 참 많은 것을 배워
요.” 자리를 매 보니 여러 가지를 알게 되겠더란다. 가령 재료로는 부들을 쓰는
데, 처음에는 시원찮은 것은 다 버렸다. 한데 차츰 하나도 버릴게 없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좋은 놈은 겉으로 쓰고 중질로는 뒤를 받치고 시원찮은 놈은 속에 넣
으면 되기 때문이다. 또 고드랫 돌도 좌나 우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자리가 재대
로 매지지 않더란다. 이것이 다 세상 이치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언
젠가 이 말 끝에 한 다음과 같은 말은 더 뜻이 깊다. “양수리에 가보면 부들이
지천으로 흔해요. 아무리 흔하면 뭘해요. 세상에서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
지요.”
한편 그는 사람들이 모두 입만 가지고 있지 귀가 없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한다.
모두 입만 가지고 제 말만 하려 들지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
쩌면 그가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나무한테는 귀만 있지 입이 없는 까닭인지도 모
르겠다. 또 그가 즐겨 찾아 다니는 사람들은 작은 귀나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지
도 모르겠다.
그는 지금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할아버지대부터 살던 낡은 기와집에 혼자 산다.
아들 딸들은 모두 나가 살고 아내도 딸을 따라가 산다. 논농사는 힘이 부쳐 대부
분 남을 주고 콩, 팥, 도라지, 율무, 수수, 차조 등 비교적 힘이 덜 드는 밭농사만

직접 한다. 물론 혼자서다. 밥도 혼자 해먹고 빨래도 직접 한다. 그렇지만 혼자서
사는 것이 힘든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혼자 사는 것이 오히려 삶을 가능한 한
단순화시키려는 그의 생활신조에 맞는지도 모른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
게 산다. 먹는 것은 늘 밥에 찬 한두 가지면 된다. 수도가 없어 우물물을 쓰는데
그것도 조금만 길어 쓴다. 힘이 들어서이기도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물을 쓸데없
이 많이 쓰는 것이 그는 못마땅하다. 세수할 때도 비누를 쓰지 않는 만큼 물이 별
로 들어가지 않으며, 밥알 하나 국물 한 방울 안 남기는 것이 그의 식사버릇이어
서 설거지는 매번 하지 않아도 된다. 옷은 합성세제는 물론 비누도 쓰지 않고 그
냥 물에 헹구어 널었다가 입는다. 이렇게 사니까 쓰레기가 하나도 안 나와서 여간
만 좋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무얼 했다고 살면서 쓰레기까지 냉기니껴. 쓰레기
라도 안 냉기고 살 생각이래요.” 그래서 과일도 껍질째 먹는다. 껍질과 살사이에
양분이 많다는 따위 합리적인 생각에서가 아니고 쓰레기를 안 남기기 위해서다.
씨도 몽땅 먹어치우는데 포도씨만은 혓바늘이 돋아 그러지를 못한다. 옷이나 신도
내다 버려 본 일이 없다. 입다 입다 못하면 옷은 걸레로 쓰고 헌 신은 슬리퍼로
고치거나 발뒤축을 받쳐 수해를 막는 역할을 하게 한다.
하긴 그 짓도 해본 지 오래되었으니 지금 신고 있는 신, 입고 있는 옷이 모두 남
이 버린 것을 주워다 신고 입는 것이다. “물자가 너무 흔해요. 쓸데없이 많아요.
나만이라도 좀 덜 흔하게 살고 싶어요.” 그가 종종하는 소리다. 또 이런 소리도
자주 한다. “덜 먹고, 덜 입고, 덜 갖고, 덜 쓰고, 덜 놀고, 이러면 사는게 훨씬 더

단순화될 터인데요. 쓰레기도 덜 생기고, 공해니 뭐니 하는 문제도 상당히 해결되
겠지요. 풍요가 덮어놓고 좋은 것만 같지는 않아요.”
어쩌면 이런 전우익선생을 시대착오주의자로 비웃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가 깊은 산 속의 약초처럼 귀한 사람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
리라.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3 00:20)
제작년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