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국책사업, 그 후 06] 새만금 신기루뎐, 바다로 돌아가고픈 장승의 꿈은 언제 이루어질까?

1987년 만경강과 동진강이 유입되는 전라북도 군산시와 부안군 사이의 바다에 방조제를 건설하고 갯벌을 매립해 광활한 간척지를 만들 계획이 확정되면서, 이곳을 새만금이라 불렀다. 만경강, 동진강 사이의 충적지대는 김만평야(김제~만경), 또는 금(金)만평야라 불렸는데, 갯벌을 메워 새로 금만평야 같은 넓은 땅을 만들겠다는 의미로 새만금이라 했다는 것이다. 여의도 면적의 140배에 달하는 401제곱킬로미터를 얻기 위해 33.9킬로미터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를 건설했다. 방조제를 포함해 투입된 비용이 4조4000억에 달하는데, 새만금사업 홍보물에서는 새만금방조제가 기네스북에 등재됐고, 중국의 만리장성에 빗대 ‘해상 만리장성’이라 홍보하고 있다. 새만금사업은 2010년 방조제 공사 준공 이후 2020년까지 1단계 내부개발에 이어 2021년부터는 2단계 내부개발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새만금은 1998년, 경인운하는 2003년, 한탄강댐은 2005년 각각 감사원으로부터 해당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고, 추진 기관에 의해 의도적으로 예측 효과가 과장됐다는 내용의 감사를 받은 바 있다. 그런데도 이들 사업이 추진된 것은 우리 사회의 비합리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사업의 추진과 중단 그리고 재추진이라는 롤러코스터를 반복했던 새만금사업의 지난 과정을 보면 그 비합리적 추진력의 존재가 여실히 드러난다. 새만금은 박정희 정권부터 시작된 국가주도의 폭력적 개발 프레임에 지역 발전론이란 허상이 가해지면서 시작됐다. 새만금사업의 추진주체들은 대규모 방조제 건설과 갯벌 매립을 통해 기득권 또는 사적 이익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통한다. 전문가들은 이들을 성장연합 또는 토건동맹이라 부른다. 
 
순수한 구민 목적 농지조성? 절대 비순수 새만금사업!
새만금사업의 추진 배경에 대해 많은 분석들이 있다. 새만금사업은 처음에는 식량안보 해결을 위한 농지조성을 목표로 시작됐다. 부안군 변산면 부항리에 위치한 새만금홍보관에서는 새만금사업의 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전략) 정부는 1970년대부터 식량자급자족이라는 정책적 목표달성을 위해 전국적인 간척사업지역 조사를 실시하였다. 1986년도에 드디어 서남해안 간척농지개발계획의 윤곽이 나오면서 새만금사업도 추진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국민들의 배고픔과 먹을거리를 해결해보자는 순수한 구민(救民)목적의 농지조성사업으로 1991년 11월 28일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서두터에서 새만금사업의 신호를 알리는 기공식을 가지게 되었다. (후략)”
홍보와는 달리 새만금사업이 ‘순수 구민목적의 농지조성 사업’이라는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수많은 증거가 있다. 먼저 『미완의 기록 새만금사업과 어민들』(아르케, 2013)에서 새만금사업이 식량안보 목적의 사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새만금사업에 앞서 1963년부터 전북 부안군 계화도(새만금방조제 내부 지역)에는 간척사업이 진행됐는데, 방조제 공사, 내부 간척공사와 이주민(섬진강댐 수몰민) 정착까지 20여 년이 소요됐다. 식량난이 심각했던 시절에 진행된 사업은 정작 식량난이 해결된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쌀을 생산하는 상황이 됐다. 새만금사업은 식량난이 해결된 1980년대 후반에 구체적으로 기획됐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이 사업은 순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농지보다 생산성이 높은 바다와 갯벌이 사라졌고, 지역 주민은 극심한 갈등으로 계속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식량생산이 절실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토목사업의 지원세력이었던 정부 내 경제부처가(당시 경제기획원) 쌀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농지 확보를 하겠다는 새만금사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새만금사업의 추진 배경을 자치단체, 정치인, 관료집단, 건설사의 관점에서 풀이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자치단체는 인구 유출에 따른 자치단체의 영향력 감소를 방지하기 위해 지역의 성장연합을 동원해 외부자원(국가예산)을 끌어들인 사업을 추진하고자 했다. 정치인들은 지역개발이라는 일회용 선심성 공약으로 표를 얻고자 했고, 이를 부추긴 것은 관료집단이었다. 이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창출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다. 건설사들은 중동 건설경기 특수의 퇴조에 따라 안정적인 수익 창출을 위해 국내에 대형건설사업을 벌여야 했다. 이익을 위해 결탁한 이들에 의해 새만금사업은 추진된 것이다. 
새만금사업은 1987년 대선에서 전북권의 표를 의식한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이를 공약화 하면서 공식화됐지만, 사업의 타당성 문제로 경제 부처의 비판적 입장 때문에 실제 방조제 착공은 4년이 지난 1991년 11월에야 시작됐다. 착공 배경에 정치적 거래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준기 기자(『내일신문』)는 이전 정부 농림부의 핵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중간평가 연기 조건으로 새만금사업이 착공된 것”이라 말한다. 민주당 집권 당시, 전북지역에서 후보자의 도덕성 문제로 선거에서 패배했음에도 지역여론은 새만금 홀대론 때문에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왜곡하는 등 새만금사업의 추진과정은 지역정서에 기댄 정치적 행위의 산물이었다. 지방선거, 총선, 대선 등에서 여야 정치인들은 누가 더 허황된 새만금 그림을 잘 그리는가를 경쟁하듯 관련 공약을 쏟아냈다. 새만금 정치판은 신기루 전장이었다.
 
새만금사업 추진파들의 몽니와 지역정치의 한계
1990년대 초부터 서울대 김정욱 교수 등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시화호나 새만금사업 모두 수질 악화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갯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던 시기였다. 당시 전북환경연합에서 상근활동을 했던 주용기 전북대 전임연구원은 “1994년 초에 MBC에서 방영된 『갯벌은 살아있다』를 보고, 갯벌의 가치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해 새만금사업의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한다. 1996년 호주 람사르 총회는 국내 갯벌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기폭제가 되면서 새만금사업에 대한 전국적인 반대운동이 조직됐다. 새만금사업 반대운동의 또 하나의 기폭제는 1996년 죽음의 호수가 돼버린 시화호 사건이었다. 새만금사업 역시 담수호를 조성해 용수를 공급할 계획이었는데, 시화호 사례는 담수호의 수질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 1997년 대선 이후 구성된 정권 인수위에서는 시화호, 새만금, 경부고속철도 등을 김영삼 정권의 3대 부실 사업으로 규정했고, 이후 1998년 감사원 새만금사업 감사까지 이르게 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 부처 내에서 서로 다른 입장들이 돌출했다. 농지가 아닌 새만금 복합개발을 주장하는 전북도청과 달리 농림부는 농지 목적을 고수했지만, 당시 해수부는 신항만 건설계획을 철회하는 등 새만금사업에 부정적 입장을 드러냈고, 환경부는 담수호 수질 개선이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대중 정권 때 탄생한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PCSD)도 새만금사업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새만금사업이 강행된 배경에 역시 정치계와 지역의 사업 추진파들이 맺은 정치적 동맹이 존재한다. 생태지평 명호 사무처장은 “97년 당시 정권인수위가 새만금사업을 부실로 지정한 것은 시화호와는 성격이 다르다.”라고 말한다. 새만금사업은 이전 정권에서 예산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아서 부실로 규정했다는 것으로, 실제 당시 김대중 당선인은 새만금사업 해외 투자사에 친필 서한을 보내는 등 새만금사업에 대한 지지 입장을 보였다. 남준기 기자는 한국농어촌공사의 숨은 욕망을 지적한다. 시화호 사건이 있었음에도 한국수자원공사가 내부 개발을 추진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농어촌공사는 미래 자신들의 먹거리를 위해 새만금사업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업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의 몽니도 크게 한몫 했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새만금사업에 대한 찬반 전문가들이 결합한 민관공동조사단이 운영됐는데, 찬성 측 전문가들은 담수호 수질을 개선할 수 있고, 새만금사업이 통일을 대비한 식량기지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사업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민관공동조사단장이 개인적 의견을 전체의 의견인 양 왜곡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정권은 2001년 전북지역 재·보궐 선거 패배에 따른 부담 등을 핑계로 2001년 새만금사업을 친환경 순차개발이라는 미명으로 재개시켰다.
새만금사업을 다시 사회적 이슈로 등장시킨 것은 2003년 새만금 삼보일배였다. 종교인들이 참여한 삼보일배는 당시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국내외에 새만금사업에 대한 비판여론을 크게 확산시켰다. 전북도청 등 새만금 추진 측은 대규모 관제시위를 조직적으로 일으키면서 새만금 반대 전문가들을 협박하는 등 맞불 작전에 나섰다. 2003년에는 새만금사업에 대한 대안 논의도 있었는데, 해수유통을 전제로 전북지역을 위해 새만금 일부를 개발하자는 안이었다. 새만금 행정소송도 진행됐다. 2003년 7월 1심에서는 본안소송 판결 선고까지 방조제 공사와 관련된 일체의 공사를 중단할 것이 결정됐지만, 곧이어 벌어진 2004년 1월 2심에서는 1심 결정이 취소되고 공사가 다시 재개됐다. 2005년 1월에는 법원의 조정권고안으로 공사가 중단됐지만, 2006년 3월 대법원 판결을 통해 공사가 최종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새만금사업은 2006년 4월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가 진행됐고, 2010년 4월 외곽방조제를 준공했다. 새만금 개발을 위해 2008년 재정된 「새만금사업추진및지원에관한특별법」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여야 후보들이 방문해 새만금 개발 지원을 언급하면서 지난해 말 개정됐다. 이를 근거로 새만금개발청이 만들어졌는데, 6개 부처로 나눠졌던 새만금 내부 개발 사업이 하나로 통합해서 추진될 수 있다는 것이 새만금개발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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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계속되는 새만금 피해
이 사이에 원래 70퍼센트로 계획됐던 농지는 30퍼센트로 줄고 나머지를 산업단지 등 복합개발지역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남준기 기자는 ‘새만금사업이 농지 중심이 아니라는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추진 측의 손을 들어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농지 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는데, 이를 대법관들이 몰랐다는 것은 직무유기이거나 무능 둘 중에 하나다. 쌀은 남아서 못 팔고, 조개는 없어서 못 파는 상황에서 어떻게 새만금사업이 타당한가?”
지난해 6월 전북환경연합이 주최한 새만금사업 토론회에서 전북대 지구환경과학부 오창환 교수는 “새만금 개발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사상누각”이라면서 “마치 MB정권의 4대강사업처럼 개발계획을 확정하기 이전에 꼭 필요한 개발의 성공 가능성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라 지적했다. “새만금 개발의 핵심은 담수호 조성 및 수질 개선인데, 새만금으로 유입되는 만경강 및 동진강의 수질이 지난 10여 년 동안 1조5000억 원을 투입했지만 개선되지 않고 있다.”라면서 “향후 10년 동안 2조4000억 원을 더 투입할 예정이지만, 새만금방조제 때문에 해수유통이 현재보다 더 줄어들어 수질 개선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새만금사업으로 방조제 완공 전 1~2등급이었던 수질이 2010년 3~4등급으로 악화돼, 새만금 생태계도 급격히 변해버렸다. 새만금 갯벌의 특산품인 백합, 동죽이 집단 폐사하는 일이 발생했고, 멸종위기종 대추귀고동과 바다민달팽이, 짱둥어가 사라졌다. 방조제 외곽 지역에서도 피해가 발생되고 있는 상황이다. 토종고래인 상괭이가 대량으로 폐사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전북환경연합 이정현 처장은 “돌고래 제돌이 한 마리 방사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상황에 상괭이 240여 마리가 집단 폐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개탄했다. 방조제 완공 이후 갯벌이 감소하면서 철새들도 줄어들었다. 현재도 새만금 일원에서 철새를 조사하고 있는 주용기 전임연구원은 “새만금사업 전 약 19만 마리의 도요물떼새들이 현재는 2000마리에서 많아야 4000마리 정도로 80~90퍼센트가 감소했다.”라고 지적한다.
갯벌에 기대어 살던 지역 주민들 삶이 피폐해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시화호 사례와 마찬가지로 얼마 되지 않는 보상비, 그것도 분할해서 받은 보상비로는 ‘갯벌 없는 삶’을 유지하기 불가능했다. 간척지를 무상으로 준다는 소문에 현혹돼 기대도 해봤지만, 역시 신기루였다. 새만금방조제 끝막이 공사 이후 주민들의 상황을 조사했던 구도완 한국환경정책연구소장은 2012년 조사자료에서 ‘맨손어업은 몰락했고, 어선어업은 위기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지역 주민들이 경제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맨손어업층은 임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등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울증 등 어민들의 정신적 건강이 악화되면서, 육체적 건강도 나빠지고 있다고 한다. 
전북환경연합 이정현 처장은 최근 열린 새만금 관련 토론회에서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과거 새만금 개발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전문가들도 현재 상태로는 수질 유지가 어렵다면서 해수유통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새만금 변화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시민환경연구소 박숙현 연구원은 자신이 만난 전북도청 관계자들도 해수유통에 대해 고려하고 있다고 전한다. “열린 자세로 의견을 듣겠다면서 필요하다면 조력발전에 대해서도 의견을 주면 고려하겠다.”라고 전북도청 고위 관계자가 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새만금 담수호 수질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광범위한 동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새만금사업 결정 및 추진이 추진세력의 이익을 매개로 한 정치적 결정에 의해 계속됐다는 점에서 새만금의 미래를 전망하기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많다.
 
새만금의 미래, 지역 주민 중심으로 풀어야
생태지평 명호 사무처장은 “새만금사업은 실패를 넘어 참극이 될 것”이라 말한다. 수질, 경제성, 생태계 파괴, 지역 공동체 파괴 등 모든 문제가 애초 예견했던 바 그대로 드러나고 있지만, 앞으로도 30조 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되는 새만금 내부 개발계획이 중단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반경 30킬로미터 안에 광활한 갯벌을 매립할 석산 등도 없는 상황에서 현재 내부 방수제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새만금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라고 진단한다. 해수유통을 공식화 한다는 것은 이 사업의 공식적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어서 책임 문제도 뒤따른다. 내부 개발에 필요한 용수 공급 문제는 용담댐 용수 공급 및 금강 하구둑 문제와도 연결돼 있다. 새만금 갈등이 단지 새만금만의 문제로 정리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정현 처장은 “2015년 환경부가 새만금 수질에 대한 중간평가를 할 때, 새만금사업은 재논의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환경운동가들도 새만금에 대해 관심이 없어진 현실에서 쉽지만은 않지만 지금이라도 전 국민의 뜻을 모아 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향후 대응 방향의 일단을 내비친다. 명호 처장은 “환경운동 진영이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새만금 대응의 결정적 실패 요인”이라 지적하면서, 지역 주민 중심의 운동, 즉 수평적 운동 방식을 제안한다. 주용기 전임연구원도 지역 주민 중심의 운동을 강조한다. 새만금의 미래는 지역 주민들과의 긴밀성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지난 11월 8일 부안군 변산면 해창갯벌을 찾았다. 한때 전 국민적인 관심 속에 조성된 장승촌은 이미 퇴락해 각시를 잃어버린 대장군만 있거나, 목이 잘려 나뒹구는 장승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장승 옆으로 1미터 높이의 침엽수가 자라고 있는 것이, 말라붙은 따개비가 없었다면 원래부터 육지였다는 착각을 들게 한다. 말라버린 장승들이 다시 바다를 꿈꿀 수 있을까?
 
글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원 leecj@kfem.or.kr  
사진 이성수 기자 yegam@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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