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2] 새만금간척에 대한 어민들의 생각/ 이코마 켄지

한일공동갯벌조사단 갯벌문화팀 리포트

새만금간척에 대한 어민들의 생각

 
일본습지네트워크는 환경운동연합과 2000년 2차에 걸쳐 새만금갯벌을 공동조사했다. 간척에 의한 갯벌의 손실이라는 똑같은 상처를 가진 한일 양국의 NGO들이 국제연대활동을 통해 알리고 싶었던 것은 ‘갯벌은 생명이며 생명의 가치를 경제가치로 환원하려는 모든 개발사업은 필연코 실패할 것이며 궁극의 손실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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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과 비응도를 연결하는 제방을 건너며/8월 23일 오전

 
긴 제방이 비응도로 이어진다. 3km는 될까. 입구의 검문소에서 군인에게 제지당했지만 관계자의 노력으로 허가가 나왔다.
비응도는 둘레 4km 정도의 작은 섬이다. 폐교가 된 초등학교가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어업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섬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섬의 대부분은 제방의 북쪽에 만들 새로운 간척 제방의 기초석 공급을 위해 붕괴되었으며 지금도 공사는 계속되어 대형 불도저가 산 사면에서 큰 팔을 움직이고 있다. 덤프트럭은 깎아내려진 돌을 운반하고 있다. 산을 깎아 바다를 매립하는 고베(神戶)방식의 거대 토목공사다.

여기에 오기까지 새만금간척공사밖에 머리 속에 없었는데 비응도 공사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만금과는 별도의 새로운 공사다. 새만금간척공사 지도를 보면 그 북쪽에 주의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선이 있다. 북쪽도 간척공사가 가능한 곳은 전부 간척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새만금의 남쪽도 그럴 것이다. 한국의 서해안은 한국정부에게 있어서 모두 황금의 간척예정지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규모 간척공사가 시작된 것은 일본의 식민지시대부터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일본에 보낼 쌀을 많이 증산하기 위하여 간척공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토지 우선주의에 의한 간척이다. 그 무렵 생긴 간척지는 지금 이곳 군산을 유수의 도작(稻作)지대로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 맺히는 낱알들이 이 토지의 풍요로움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생육이 풍성한 논에서 조금 걱정이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도 쌀 소비가 적어져서 쌀이 남는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패스트푸드에 입맛을 빼앗겨 쌀도 김치도 그다지 먹지 않게 된 듯하다. 어린이들의 비만도 늘고 있다 한다.

더 좋지 않은 이야기도 들었다. 한국의 간척계획은 일본의 식민지시대에 세워진 계획을 토대로 하여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60여년 전에 끝난 식민시대의 정책이 지금도 한국의 어민들을 괴롭히고 있다니….
 

비응도 어민들의 3년 후의 기대

 
비응도의 제방 바깥에 있는 작은 어항(漁港)의 조사에 들어갔다. 어획한 활어를 보며 비응도 어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 30명이 이곳에서 어업권이나 중매권을 가지고 있는데 3년 후에나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새만금간척공사에 따르는 보상의 일환으로 각종 어업 관계 시설이나 관광시설을 3년 후에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섬 주민은 전원 섬을 나가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지만 이 어항에 관한 권리만은 팔지 않겠다며 지금도 매일 어로작업을 나가고 잡아온 고기의 중매를 하며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

과산화수소수가 담긴 푸른 폴리에틸렌 용기가 있었다. “양식에 사용하는 것인가?” 물었다.
“의자로 쓸 뿐이오.” 대답은 어딘지 회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폴리에틸렌 용기는 2000년 정월을 즈음한 겨울에 일본 해안에서 대량으로 발견됐던 것으로 우시부카(牛深)의 무관(茂串)해 안에도 30개 정도가 밀려왔던 것이었기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답답할 뿐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출항했던 선박이 들어왔다. 붕장어·쥐놀래미·민꽃게 등이 차례로 하역됐다.

섬 북쪽의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또한 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새만금 제방을 달렸다. 제방 바깥쪽의 호안공사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의 갯벌간척지인 이사하야 만 공사현장이 출입통제돼 있는 것에 비해 입구에서 군인의 체크는 있으나 얼마든지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했다. 주민출입제한이 없다는 사실은 엉뚱하게도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공사중인 제방 중간에서 되돌아왔다. 섬과 본토를 연결하는 제방 안쪽에는 선박 30척 정도가 느긋하게 떠있다. ‘저 한가로운 시간이 보상금으로 환급되기를 기대하고 있는건가’ 상상을 했다. 가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렇다면 비응도의 이주에 따르는 보상금은 1년분의 수입정도였나.’ ‘어디로 몇 명(몇 가족)이 이주한 것인가.’ ‘이주지의 집이나 토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주지에서의 생활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어린이들의 학교나 교육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사람들의 지금 기분은 정말로 어떤 것인가.’ 물어야 할 것은 잔뜩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어민들의 마음을 열 수 있을까 걱정됐다.

11시가 지나서 입구의 검문소를 나오자 검문소 남쪽 갯벌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 오늘은 9시경이 만조라고 했기 때문에 바닷물이 빠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 것이다. 우리도 바다로 들어가 보자고 했다. 그레(조개잡이 도구)를 가지고 바다로 가는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바다로 갔다. 도구나 복장의 차이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아마추어인 아주머니들의 힘찬 목소리가 넓은 갯벌에서 들뜨고 있었다.
 

어업권 포기로 갯벌에서만 조개 잡는 사람들

 
한국의 갯벌에서는 일반인이 조개를 잡을 수 없다고 한다. 바다에는 어업권이 있어서 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바다에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역시 한국에서도 바다는 시민에게 열려진 것은 아니었다. 시민에게 폐쇄된 바다는 이번에도 국가의 힘으로 어민까지도 내쫓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새만금갯벌은 서해에서 지워질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업권에 의해 저지당한 국민의 바다에 대한 접근은 접근권을 가진 어민들의 어업권 포기에 의해 ‘회복’된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제방 완성까지의 기간 동안 주민과 시민에 대한 국가의 배려라 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갯벌의 죽음이 진행형인 상황에 반해 밝은 모습으로 조개를 잡는 사람들과 여름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의 환성도 들린다. 가족동반으로 온 사람들 이웃과 온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웃고 이야기한다. 건강 그 자체다. 바다는 모두의 것이다. 그것을 언제부터 누군가의 것으로 정했던 것일까. 어업권은 그 바다에서 어업을 할 권리일 뿐 바다를 소유하는 권리는 아닐 것이다. 바다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어업권은 그 지역 바다를 지키기 위해 인정된 것이라는 걸 잊어버린 것일까. 누군가의 것이 되었다고 착각했을 때부터 바다는 사고 팔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 아닐까.
 
조금이라고 하는데도 바닷물이 많이 빠진다. 물막이공사가 진행되어 만조 속도가 빨라지고 썰물 속도는 느려졌다고 들었는데 일본해안에 비하면 척척 바닷물이 잘도 빠져나간다. 바닷물이 빠짐에 따라 아름다운 모래갯벌에서 펄갯벌로 바뀐다. 게나 집게 고둥이 주로 서식하던 곳에서 백합·바지락·재첩·맛조개 등의 주 서식처로 바뀌어 간다. 바닷물의 들고 남에 따라 갯벌생태가 적응한 것이다.
 

33km의 물막이 제방의 영향

 
새만금 제방의 총길이는 33km. 현재까지 19km의 제방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머지 14km도 상당한 양의 사석이 이미 투입되어 꽤 얕아져 있는 것을 항공사진에서도 알 수 있다. 어민들과의 질의응답에 의하면 어민들이 느끼고 있는 물막이공사의 영향은 다음과 같다.

△ 밀물의 속도가 빨라지고 썰물의 속도는 느려졌다.
△ 이 때문에 지금까지보다 1미터나 갯벌이 쌓였다.
△ 조개의 주서식지가 바뀌었다.
△ 어장이 변했다.
△ 항로가 바뀌었다.
△ 섬으로 가는 바닷길이 바뀌었다.

 

조개잡이의 첨단기지·하제항

 
풀이 우거진 공원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하제로 향했다. 물이 빠진 항에는 커다란 조개잡이배가 갯벌 위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들어 앉아 있었다. 깊은 갯벌의 굴곡은 일본 아리아케 해의 가장 깊은 곳보다도 박력이 있었다.

선착장 앞의 작업장에서는 오늘 아침에 채취한 조개를 까고 있었다. 대량의 재첩(일본의 개량조개와 비슷)에서 솜씨 좋게 살을 발라내는 아주머니들은 진지했다. 이 조갯살 바르는 작업은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배에서 잡은 조개는 상처가 많고 게다가 소비자의 입으로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을 고려하면 살아있는 채로는 출하가 어렵다고 한다. 조갯살로 발라진 상태로 시장에서 팔리고 있었다. 백합은 껍질이 단단하게 꽉 다물어져 있는 것과 유통경로가 확립되어 있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살아있는 채’로 중매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여름철 조개는 비브리오균 등 식중독이 우려되기 때문에 생식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냄비요리나 조개다시물을 내서 먹게 되는데 겨울에 비하면 그 가격은 반 정도라고 한다. 다만 10cm정도 큰 것은 보통 크기의 것에 비해 3배 정도의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하제항에서 1척의 목조선이 수리되고 있었다. 배 밑바닥을 굽기도 하고 판자 사이에 삼나무 껍질 비튼 것을 채워 넣고 방수처리를 하기도 하는 등 목수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일본 큐슈의 아마쿠사에서도 이제는 거의 볼 수 없게 된 작업이었다.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이 배의 주인이란다. 그에게 몇 가지를 질문했다.

배 수리에는 6백만원이 든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업권을 가지고 있지만 저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바다에서 어부로 살아갈 작정입니다. 배 수리가 끝나면 어업권을 가지고 고기잡이를 해나갈 것입니다. 바다에서 하루 고기를 잡으면 50만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습니다. 기름값이나 일당을 제하고 나면 거의 남는 것은 없지만 저는 이 바다에서 살고 싶습니다.” 30세의 수줍은 듯한 이 젊은이가 언제까지나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는 바다였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생겼다.
 
한국의 소금은 정말로 맛있다
 
옥구염전으로 향했다. 안내하던 분이 염전일이 아주 힘든 중노동이라고 일러준다. “여름철 염전은 염기가 섞인 찜통 더위로 요즘에 가장 힘든 노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넓은 염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로부터 유입한 해수를 태양열을 이용해 점점 뜨겁게 해간다. 옛날 그대로의 염전이었다. 커다란 간자(干字)형의 밀대로 결정된 소금을 모으고 있었다. 염전 안에서 산처럼 쌓인 소금을 외바퀴수레로 싣고 나와 창고 옆에 쌓아 올렸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했다.
 
염전 안에서 소금 결정을 한줌 입속에 넣었다. 맛있었다. 부드러운 소금이었다. 혀를 찌르는 짠맛은 없고 단맛조차 느껴졌다. 이것이 참맛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마쿠사의 통사도(通詞島)의 천연소금보다도 맛있었다. 쉬고 있는 세 분을 찾아 이야기를 들었다.

“염전의 면적은 1만2천평(약 4만㎡)인데 이것을 소유자로부터 8명이 빌려서 일을 합니다. 여름에는 하루 4천5백㎏ 정도 생산합니다. 가격은 30㎏에 8천원. 겨울에는 작업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맛있는 소금이라면 일본에서는 1㎏을 1만원에 팔 수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놀라면서 ‘어떻게 그렇게 비싸게 팔 수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모든 식재료에 돈을 들이는 건 아니지만 일본은 건강붐이나 식도락붐으로 인해 적어도 조미료만은 진짜를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었지만 자신들의 소금이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당장은 믿을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조사팀의 일원이었던 사가대학의 타케다 교수가 이곳의 소금을 가져가서 조사해 보겠다고 했는데 결과가 궁금해진다. 굉장한 결과가 나오면 일본으로 수출하는 것을 알려줄 생각이다.

그러나 정작 새만금간척사업이 진행되면 이 옥구염전도 끝장나고 만다. 해수를 막아 담수호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므로 어떻게 손 쓸 도리도 없는 일이다. 정말로 애석하다. 깨끗하고 풍부한 바다의 생명인 소금을 없애는 일은 ‘자살행위’가 아닐까. 더구나 이렇게 맛있는 소금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만물의 근원인 바다의 소금이 일본에서는 돌소금(巖鹽)이나 공업염(Nacl)으로 대체됐다. 그런 일이 한국에서도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한국 염전의 운명도 일본과 같은 길을 걷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한국은 간척사업 이전부터 중국에서 값싼 암염을 수입한 탓에 소금가격이 하락했고 결국 염전가의 의욕을 떨어뜨린 상황이라 한다. 그렇게 염전생산이 중단된 염전들은 점차 공업용지나 농업용지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염전은 좋은 농지도 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공업은 임해형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염전하는 분도 말씀하셨다. “중국의 암염으로 담근 김치는 맛이 없어요. 한국의 바닷물로 만든 소금으로 담근 김치가 역시 맛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현재 1년간 주택용지나 공업용지(황무지 등 경작 포기지역도 포함) 등으로 전환되는 농지가 3만헥타르라고 한다. 그래서 줄어든 농지를 보충하기 위해 간척사업을 한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이상한 이야기다. 염전을 비롯하여 마지막에는 바다로 여파가 미친다. 아직 바다는 무진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더욱 유감스러운 일도 들었다. 옥구염전으로 이어지는 만경강의 오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새만금과 같은 넓은 갯벌의 자정력에 의해 만경강의 오염피해는 그 정도로 심각한 지경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공사가 완성되면 갯벌은 죽어버리고 담수호의 물은 썩어 버릴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물 흐르지 않는 물은 죽은 물이거나 죽어가는 물일 뿐이다.
 
이것은 일본의 사업이 아닌가
 
새만금 간척사업은 전주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전주는 한국 서해안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며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한국 벼농사의 중심지다. 샛강이 종횡으로 달리는 모습은 일본의 사가평야와 흡사했다. 감탄하는 와중에 안내자가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은 일본 식민지시대에 간척된 토지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비슷했던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증산된 쌀은 거의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아직도 많은 먹을거리가 일본으로 보내지고 있다. 조개도 돼지고기도 일본행이다.

농업이라는 나무를 싹둑 잘라버린 것도 일본과 똑같다. 도시화·공업화가 일본 이상의 고속도로 진행되어 도·농간 소득격차가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식만은 농촌이나 어촌에서 자신들처럼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집념이 일본 이상의 교육열기로 입시전쟁이 과열되는 한국의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자녀를 도시 명문대학에 들어가게 하고 일류사회에 취직시켜 입신출세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 부모들에게 있어서 살아가는 위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일본과 마찬가지로 농업후계자는 자라지 못한다. 한국 농업의 문제는 농지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농업에 전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이 나라의 농업정책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값싼 농작물이 자꾸 수입되어 식량자급률은 1997년 현재 30%까지 내려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쌀만은 남아돈다고 하는 것도 일본과 같다. 젊은 사람들이 쌀을 먹지 않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농지도 남아도는 듯하다. 그 증거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해마다 3만헥타르나 되는 농지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만금간척으로 만들고자 하는 농지 2만8천헥타르는 사실은 필요없는 것이다. 일행 가운데 한국인 한 분이 ‘정말로 농지가 필요하다면 지금 있는 농지를 1년간만 보호하는 것으로써 충분합니다. 새만금처럼 생산성이 높은 바다를 몇 조원을 들여서 일부러 농지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에 농지와 준농지의 보존정책은 없는 것인가?

일본의 전후에 계획된 많은 공공사업의 목적 중 가장 큰 것은 쌀의 증산이었다. 그러나 공업중심의 발전과 식생활의 급격한 변화로 쌀은 남게 되었으며 댐이나 간척사업의 의의는 희박해졌다. 한국도 같은 길을 이대로 걷게 되는 것은 아닐까. 콘크리트화된 호안과 오염된 일본의 바다를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농업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지 않으면 한국의 농업을 짊어지려고 하는 젊은이는 나오지 않는다. 물론 어업도 마찬가지다. 만물의 근원인 바다를 없애는 것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일임을 깨달았으면 한다. 일본의 실패에서 한국이 배웠으면 한다.조
 

개잡이 첨단기지·김제시 거전에서의 조사/8월 24일 09시

 
-김희관 씨(51세 가명) / 안상수 씨(63세 가명)

“이 마을은 약 60세대 2백명이 살고 있으며 90%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재첩·백합·가무락조개 등을 손으로 채취하고 있습니다. 그레라고 하는 도구로 백합을 갈코리로 가무락조개를 잡고 있습니다. 그레의 가격은 3만원 갈코리는 1만원∼1만5천원 정도인데 그레는 폭이 좁은 옛날것은 50년 이상된 것도 있습니다. 넓은 것은 3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넓은 쪽이 효율적이고 많이 잡을 수 있습니다. 백합은 모래 속 약간 깊은 곳에 있습니다. 재첩은 얕은 곳에 있지요. 가격은 백합은 여름에는 1㎏당 5천원∼6천원 겨울에는 1만5천원이 됩니다. 재첩은 년간 5천원 정도. 잡히는 양은 백합은 한 사람이 여름에는 10㎏∼20㎏ 겨울에는 5㎏∼7㎏ 정도입니다. 잡은 조개는 매일 중매상이 와서 사갑니다. 새만금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조개를 잡기 위해서는 앞바다쪽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지요. 또 만경강의 오폐수 방류로 인해 뻘이 오염되고 있습니다. 동진강은 아직 깨끗한 것 같습니다만.”

여기까지는 김씨도 안씨도 같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두 사람의 생각은 엇갈리고 있었다.
안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대로라면 어민의 생활이 곤란합니다. 이미 갯벌이 오염되어 앞으로 수확량의 증가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옛날부터 이 바다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반대하지만 국가로서는 필요하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농지는 필요하니까요.”

김씨의 대답은 달랐다. “나는 새만금 간척공사에 반대합니다. 우루과이라운드로 값싼 수입식료품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농업은 수입품에 밀려 미래의 전망이 없습니다. 농업을 하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물론 후계자도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농지만 있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우리도 조금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점심은 여기에서 가능한가요’ 라고 안씨에게 묻자 ‘국수밖에 없어요. 밥은 안 됩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갯벌팀 모두는 ‘국수라도 좋습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지요’라고 답했다. 안씨와 부인이 점심을 준비해 주었다.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에서는 한 사람당 월 60만원을 벌고 있습니다. 나는 반농반어지만 농업은 부업같은 것이지요. 쌀농사를 하고 있는데 3천평에서 연간 7백만원∼8백만원의 수입을 거둘 수 있습니다. 한 사람당 경지면적은 2천∼3천평 사이일 것입니다. 최근 이 근처의 논은 1구획 1천1백평으로 정리되었기 때문에 2천1백평 정도나 될까요? 후계자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어민이 늘고 있습니다. 조개는 생선에 비해 안정적이지요. 매년 3백일은 바다로 나갑니다. 바다에 가면 무엇인가는 잡을 수 있습니다.
 
다만 최근에는 3km나 더 앞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곳에서도 배로 조개를 잡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주변에 매어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많은 배는 야마하 보트로 바다로 조개를 잡으러 가는 사람을 운반합니다. 작은 목조선으로는 뱀장어 새끼를 잡고 있습니다. 큰 배는 재첩을 잡지요. 펌프로 압력이 가해진 물을 쏘아내 큰 조개를 잡습니다. 4백킬로그램의 수압이지요. 하제의 저인망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조개에 흙이 들어가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어업협동조합이 있었습니다. 뭍에 끌어올린 해산물의 3%를 어협에서 거두고 있었습니다. 1997년 새만금간척공사 보상과 맞추어 어협이 없어졌습니다. 그 이후 이 바다는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방이 완전히 만들어지기까지는 다른 지역사람들은 들어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른 지구에서는 마을 사람들에게만 인정하는 제한어업권이 나온 곳도 있습니다. 여기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보상금은 2백만원∼8백50만원이었습니다. 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장 낮은 액수인 2백만원.어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 한 집에 한 사람밖에 없는 사람이 가장 높게 8백50만원입니다. 한 집에 2명 있으면 한 사람이 6백70만원으로 10년분을 보장하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1년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도 할 수 없이 도장을 찍었습니다. 아무리 반대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상금의 근거는 군산대학의 교수가 조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계획의 시작은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86년 우리들에게 알려졌을 때 우린 사실 찬성했습니다. 무언가 좋은 일인 듯했습니다. 1990년에 도장을 찍었지요. 공사에 들어가기 전에 국가가 도장을 찍게 했습니다. 정부에서 꼭 보상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정부는 그때는 금액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도장을 찍은 것이 실수였습니다.

그 때문에 1991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누구도 반대가 없었습니다. 1994년부터 1995년에 걸쳐15%의 보상금을 받고 나머지 85%를 1997년에 받았습니다. 그런데 1997년 시화호 문제가 생겨 우리도 들고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그다지 많이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많이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폐선을 1천만원에 사서 1억원 보상금을 받은 놈도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김씨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의식있는 마을은 도장을 찍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인들이 보상금 문제로 도장을 찍기 시작했어요. 한사람 두 사람 빠지기 시작하자 마을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1백명이 반대하고 있어도 어느 쪽이 되든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5명만 있으면 그쪽으로 정부가 파고 들지요.”

이 때 국수가 다 되어 점심을 먹었다. 따뜻한 국수가 맛있었다. 백합으로 맛을 낸 국물맛도 좋았다. 그물자락에 넣은 백합 위에 벽돌이 올려져 있었다. ‘왜 벽돌을 올려 놨습니까’라는 질문에 안씨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백합의 입이 열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지요. 입이 열리면 안에 있는 수분이 흘러 가벼워집니다. 가벼워지면 무게가 덜 나가기 때문에 손해를 입으니까요. 하하하. 그렇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수분이 없어지면 조개는 빨리 상하지요. 조개는 신선도가 중요하니까. 게다가 수분이 없어지면 조개맛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누름돌을 올려놓은 것입니다.
일석이조인 셈이지요 하하하.”식
 
사를 하면서 김씨에게 조개이야기를 더 들었다. 1960년대 이후 7cm 이상의 커다란 백합은 마산에서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새만금에서는 한국 조개의 70%∼80%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고창에서는 모래갯벌에서 양식하는 사람도 나왔다. 백합 양식을 하고 있던 사람은 3억원 보상금을 받아 집을 지었다.

여기서 다시 안씨가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보상금을 받는 쪽이 좋습니다. 어차피 오염되었으니까. 이제는 간척하는 편이 좋지요’라고 주장했다. 운전하는 사람이 보상금과 관련해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며 설명했다. “제 친구 중에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계화도에서 1992년에 보상금이 나왔을 때 현대자동차의 고급차가 20대나 팔렸다고 합니다. 갑자기 큰부자가 된 어민들은 큰 돈의 사용법을 몰랐던 것이 아닌가 해요.” 부정하게 번 돈은 아닐지 모르지만 갑자기 생긴 큰 돈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와 여자 중 어느 쪽이 조개잡이로 돈을 더 많이 법니까’라고 질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두 남자는 여기에서는 의견이 같았다. “여자들이 많이 벌어요. 남자는 얼마 안되서 ‘허리가 아프다’ ‘잠깐 쉬자’면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잘 잡히지 않으면 중간에 팽개쳐 버리기도 하는 등 참을성이 없습니다. 여자들은 그렇지 않아요. 남자들이 정말 끈기가 없어요.”

바로 납득했다.
“새들은 걱정되지 않습니까? 람사조약에서는 새를 중시하고 있습니다만.” 이 질문에 ‘새는 싫다. 만조 때 논으로 와서 피해를 준다’는 답이 돌아왔다.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다. 그것은 그렇다. 반농반어로 살아가는 마을사람에게 있어서 새는 때로는 물고기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그 이외에는 인간이 잡은 물고기나 기른 쌀을 가로채 가는 귀찮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하물며 람사조약 등의 단어는 처음 듣는 것일 터였다. 일본에서도 그렇지만 환경운동은 정말로 이제 막 시작되었던 것이다.

다시 보상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배를 가지고 있던 사람은 제방 내측에서 3천만원에서 6천만원으로 평균 5천만원을 받았습니다. 댐 바깥쪽에서 천만원부터 2천만원입니다. 받은 인간은 그만두고라도 다음 세대가 걱정입니다. 바다가 없어짐으로 해서 부당하게 피해를 당하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김씨의 말이었다. “어업과 농업 양쪽 다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바다로 나가면 곧 현금수입이 됩니다. 그리고 농업을 하면 노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돈을 모을 수 있으니까요.” 안씨의 말이었다. 누구라도 걱정되는 것은 일정한 수입이 있는 갯벌이 사라지려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다로 가는 트랙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물막이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조개를 잡을 수 있는 곳이 멀어졌기 때문에 조개잡이하는 사람들을 트랙터로 운반하는 장사꾼이 출현했다. 한 사람당 1만원. 10명을 운반하면 10만원. ‘조개를 잡는 것보다 벌이가 더 된다’고 두 사람은 설명했다.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점심식사도 끝나고 작별할 때가 되었다. 후쿠오카공항 면세점에서 사온 담배를 두 사람에게 건넸다. 선물하려고 사왔지만 환경연합 분들은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는 듯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할까 궁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도움이 되었다.
 

청하 어부들에 대한 질의응답 조사/8월 24일 14시 10분

 
한일공동조사단의 저서생물팀에게 배를 빌려준 어촌 근처. 비 때문에 현지조사가 무리한 것 같았기에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람이 없을까 찾고 있었다. 잠시 후 그런 분을 찾았다. 선태복 씨(50세 가명)의 집으로 초대됐다. 비 때문에 고기잡이에 나가지 않은 친구 8명이 함께 왔다. 약간 술기운이 있어서인지 모두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간단하게 인사와 소개를 나눈 후 어떤 것이 잡히는지 물어보았다.

봄 - 시라스(정어리·멸치 등의 새끼)(2월∼5월)
크릴새우류(5월)·농어(4월∼5월)·숭어(연중)
여름 - 패류·보리새우와 꽃게(5월∼6월)·백새우(연중)
가을 - 크릴새우류
겨울 - 패류(백합·꼬막·재첩·맛조개 등)

조개는 2.5km 앞에 있는 심포까지 가서 잡는다고 한다. 갯지렁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하나의 질문에 여러 명이 큰 소리로 대답했기 때문에 통역하는 이응철 씨가 고생을 했다. 조합원이나 어로법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조합원은 68명. 배는 40명이 가지고 있다. 3종류 배가 있다. 안강망·삼매망·유자망이다.정씨가 갑자기 핵심을 찔렀다. “만경강은 20년 전부터 오염되어 왔습니다. 배수처리장이 5·6년 전에 생겼지만 공업단지의 배수는 깨끗하지 않습니다. 나는 간척해도 살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상금은 4천만원∼5천만원이라고 했지만 아직 3분의 1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말을 선씨가 받았다. “어업권이 없는 사람은 보상금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에게는 거의 보상이 없었습니다. 40척의 배는 무허가로 보상이 없었지요. 자신이 그 배로 어업을 하고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는 것은 수협에 가서 조사하면 곧 알 수 있을 것인데도 보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의 40%는 받지 못했습니다. 보상금도 3년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업허가권은 5년이라는데도 말입니다. 그 4천만원도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양식은 7년간의 보상으로 3억원이라는데도 불구하고 어업은 3년간의 보상으로 4천만원이라는 것은 이상합니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정보공개를 요구할 작정입니다.”
 
그는 책상 서랍에서 서류뭉치 하나를 꺼냈다. “이것이 정부가 보상금액의 근거로 하고 있는 자료입니다. 너무나 형편없는 자료에요. 이것을 조사한 사람은 군산대학의 교수라고 하는데 지금은 군산대학에 없습니다. 있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선씨도 이 자료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귀중한 것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시작되어 통역이 불가능한 토론장이 되었다. 나는 옆에 있던 박씨로부터 이번 한일공동조사에서 통역봉사를 하고 있는 두 명의 대학생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다.

박씨는 꽤 많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굴은 빨갛고 입내가 고약했다. 그러나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미워할 수 없었다. 나이도 나와 비슷했다. 일이나 수입에 관해 물었다. “어업과 농업 둘 다 하고 있습니다. 어업에서의 수입은 2찬만원∼3천만원. 요즘 물고기의 종류는 줄었지만 시라스가 좋은 벌이가 됩니다. 농업수입은 3천만원 정도입니다. 합쳐서 6천만원 이상이 됩니다.” 내가 ‘오, 그것은 한국에서는 굉장한 부자네요’라고 하자 크게 웃었다.
 
'농지는 어느 정도 넓이에서 무엇을 재배하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3천평에서 쌀을 재배하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이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3천평에서 쌀을 재배해도 4백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지 않습니까’라고 다시 묻자 쑥스러워하면서 ‘건축 일도 하고 있기 때문에 1년이면 그 정도 수입밖에 안 됩니다’라며 웃었다. 그리고 나서 조금 진지해졌다. “사실 나는 지금은 여기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익산시로 이사했습니다. 여기에서 45분 걸리지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도시쪽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45분 거리이므로 나는 이곳에 와서 고기잡이를 하기도 하고 쌀 농사를 하기도 하고 건축 일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모든 것이 싫어져 버렸어요. 보상문제가 나오고 나서 이 마을은 재미없어졌습니다.” “뭐가 재미없어졌습니까?” “전부 다, 인간관계 전부가 재미없습니다. 나에게는 보상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항의할 생각은 없지만 보상금이 나온 사람 나오지 않은 사람 금액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등 가지각색이고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박씨는 오늘은 낮부터 마을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 그의 속마음은 말은 그렇게 해도 여전히 이 마을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박씨의 아이들은 장차 이 마을에서 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기 전에 선씨가 말했다. “배를 가진 사람도 공사를 반대합니다. 환경을 생각해서 반대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체로는 반반인 상태입니다. 20년 전에 이런 의견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는 국가보상의 근거가 된 귀중한 자료를 빌려 주었다.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전해져 왔다.


안성리(문포) 어부들과의 질의응답 조사/8월 25일 09시

 
안성리는 1920년대의 간척지를 배후로 하는 반농반어촌이다. 1964년부터 68년에 걸친 간척으로 더욱 농지가 넓어졌다. 비 속에서 어부들에게 시간을 빌려 이야기를 들었다. 장소는 정대영 씨(52세 가명)의 집. 벽에는 젊을 때 부인과 함께한 중국여행 사진이 붙어 있다. 다섯명 정도가 모였다. 여기서도 무엇이 잡히는지 물어 보았다.

“간척공사 이전에는 바다도 깊고 물고기도 많았습니다. 갈치나 조기를 비롯해 다양한 물고기가 있었지요. 그런데 간척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갈치나 조기는 잡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오염되면 잡히지 않지요. 33km의 제방 중 19km가 완성되어 있지만 나머지 14km도 이미 간척의 기초공사가 실시되었고 상당한 사석이 투입되어 큰물이 나는 간조 때에는 위험해서 배는 다닐 수 없을 정도입니다. 조직적인 지역주민 반대가 약한 상황이라 이 상태로 진행되면 1년 이내에 제방은 완성되어 버릴 것이 아닌가 이제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변의 어부들 이 계절별로 잡히는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

봄 - 시라스
여름 - 보리새우·피뿔고둥·꽃게
가을 - 숭어·농어·말뚝망둥어
겨울 - 숭어·크릴새우류·백새우

곧바로 어협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졌다. “만경강은 오염되어 있지만 동진강은 깨끗합니다. 동진강 하구는 물고기의 산란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 죽는 조개가 많아졌어요. 여기에서는 백합·재첩·가무락조개·바지락이 잡히고 있었습니다. 마을에는 1백25세대가 있으며 조합에 가입하고 있는 사람은 50세대. 다만 조합에 들어 있지 않아도 누구라도 바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에게 규제는 없었습니다. 배는 20세대가 가지고 있지만 반은 무허가입니다. 배에는 4천만원∼6천만원의 보상이 나왔습니다. 보상금은 받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노인들은 받은 사람이 많아요. 자신의 생계가 꾸려질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공사는 반대하지만 여기까지 진전되어 버렸기 때문에 제방이 완성되어도 제방 바깥쪽에서 어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곳에서도 보상금은 대립을 낳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계획의 경우 어협 조합원의 전원투표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어업권 포기가 결정되고 보상금은 조합으로 일단 들어온 뒤 그것을 조합원들이 나누는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질문했다.

“어업권은 한 사람 한사람 개인에게 있습니다. 배에 대한 권리 조개를 잡을 수 있는 권리도 개인에게 있습니다. 일본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새만금간척사업소는 보상문제 때 ‘동진강 갯벌은 없어지지만 바깥에 갯벌이 생기므로 좋지 않은가’라고 했어요. 그렇게 간단하게 바깥에 갯벌이 생기는 게 아닌데 말이죠.”
 
다음과 같은 목소리도 있었다. “보상금을 받은 사람은 찬성파입니다. 받지 않은 사람은 반대파구요. 물론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업권은 신청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사람들이지요. 지금 우리는 보상관계로 정부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부 조사에서 결정된 보상금조차 지불해 주지 않은 것과 한 사람 한 사람 같은 상황에서도 보상금액이 크게 다르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른 마을과 비교하든지 서로 비교를 하며 으르렁거리고 있어요. 서로 의심하는 귀신이 되어 사이가 나빠지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태다. 공동체의 붕괴가 가장 두려웠다.

어제 청하에 보았던 것과 같은 보상에 대한 기초조사자료의 존재를 묻자 ‘새만금 사업소에 가면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민간의 조사일 뿐 국가의 중요한 자료는 없는 것 같아요. 보상에 대한 기초조사는 받지 못했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역시 지역에 따라 정부의 정보공개 수준이 달랐던 것이다.
 
“어업허가를 받지 않아도 2백50만원∼3백만원의 보상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저는 보상금은 필요없습니다. 이곳에서 조개를 잡고 싶어요. 폐쇄되기 전까지만의 제한적인 어업허가라도 좋으니 백합양식을 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보상금은 필요없다고 했지만 정부에서는 허가를 내주지 않습니다. 2년 후에 간척이 끝나도 이 근처에서 양식을 하고 싶습니다.” 한 젊은이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반대운동이 있기 때문에 보상금을 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금액을 말하면 분규가 일어날지도 몰라요.” 우려의 목소리였다.

반농반어인 심기동 씨(57세 가명)는 ‘어업에서의 수입이 많았습니다. 특히 실뱀장어가 괜찮았지요’라며 아쉬워했다. 박학수 씨(40세 가명)는 ‘10년 전 3·4·5월의 3달 사이에 실뱀장어로 2천만원∼3천만원이나 벌었던 적이 있습니다. 전부 일본으로 수출했던 것이지요. 올해는 지금까지 4백만원 정도입니다. 제방의 영향인지 양이 적어지고 가격이 내리고 있습니다. 국가의 사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을지 모르지만 가능하면 그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호소했다. ‘노인들은 정부의 선전에는 바로 속아넘어 갑니다’라는 말도 나왔다. 유교국가에서 마을 어른들에 대한 이런 발언은 상당히 자극적인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곳 출신이기 때문에, 비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중지는 어려워요’라는 의견에 ‘간척사업을 중지시키는 편이 대통령의 평가를 높이는 것 아닙니까’라고 내가 발언하자 모두들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경우 어느 정도의 보상이 가능합니까’라고 주민들이 질문했다. 나카오 씨가 대답했다. “3천만엔∼4천만엔을 받았지만 지금은 모두 후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대답에 모두들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어조로 한 분이 말했다.

“일본은 옛날부터 간척을 해오고 있으니 간척의 장점·단점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세요. 한국에서는 예전에는 적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적조가 발생하고 있어요. 적조대책은 적토라고 하는데 정말인가요? 게다가 최근 바다에 들어갔더니 가렵드라구요. 또 제방의 한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군산에서 하루에 두 번 유람선이 오는데 큰 물이 나는 간조 때에는 배가 닿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죽은 물고기도 떠 있는 것이 발견되고요.”

역시 바다에 관한 것은 어부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다를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도 어부들이라고 한국에서도 새삼 알 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바다에서 잘 놉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아이들은 잘 놀고 있다는 대답에 ‘다행이다’라고 생각한 것도 잠깐 안강망 어업의 후계자는 없다는 말에 이곳에서도 일본과 비슷한 구조가 되어간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계화리 사람들과의 질의응답/마지막 방문지/8월 25일 오후


한국의 8월에 이렇게 오랫동안 내리는 비는 정말로 드문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덕택에라고 하면 여러 사람에게 나쁘게 들리겠지만 갯벌문화팀인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은총의 비였다. 어민들도 출어 전의 바쁜 때였다면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조사는 귀찮은 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고기잡이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비가 오는 날은 술이라도 마시든지 마음이 맞는 누군가와 토론하는 것이 딱 알맞는 날임에 틀림없다. 이곳 계화리에서는 이 날도 지금 생각하면 그런 날이었다.

계화리 집회장에는 10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고령자가 많은데 그중 손기만 씨가 제일 젊어 보였다.
“이 마을의 어업은 거의 배로 하고 있습니다. 마을 인구는 1백50명으로 40세대가 살고 있어요. 대부분이 전업어업으로 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 전체에서는 9개의 마을이 있으며 인구는 대략 2천4백명입니다. 그중 70%가 어업에 종사하고 있어요. 어종은 적습니다. 조개가 80%이고 나머지는 꽃게가 대부분입니다. 조개는 백합·가무락조개·재첩·피뿔고둥 등입니다. 1년간의 수입은 한 가족이 5백만원∼1천만원 정도일 것입니다. 백합은 그레로 잡고 있어요. 배로 잡는 사람도 15명 있지만 겨울에는 잡지 못하지요. 조개는 감소하고 있어요. 새만금간척이 시작된 5년 전부터 팍 줄었습니다. 잡히는 장소도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4∼7km나 앞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제방으로 인해 펄이 쌓여 조개의 서식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새만금보상이 너무 적고 문제가 많습니다.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하는 사람은 생활이 곤란해집니다. 보상금액은 1세대 한 사람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경우는 1천만원. 두 사람인 경우는 1천6백만원. 이미 1백퍼센트 보상을 받았습니다.”

손 씨의 말을 이어 ‘국가가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는 힘이 없다’ ‘이제와서는 너무 늦었다’라는 푸념이 나왔다. 나카오 씨가 이사하야 만의의 폐쇄로 아리아케 해가 어떻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했다. 와키 씨로부터 람사조약에서 한국 정부가 밝힌 입장에 대해서 듣고 국가도 변하려 하고 있다고 격려했다. 전씨는 시화호에서 문제가 일어나 마침내 환경운동단체도 갯벌보전에 뛰어들고 있으며 이제부터가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우리도 보상금을 받았지만 사실은 이 간척에 반대합니다. 그러나 보상금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라고 조심스레 한 분이 물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러한 간척사업을 중지시킨 적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협력해야 좋을지 가르쳐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나는 나의 경험을 전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많은 공공사업이 행해져 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가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할 수 없다고 눈 앞에 있는 둘도 없는 소중한 자연이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것을 아주 적은 보상금으로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업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자 대부분의 곳에서 예전이 좋았다 돈은 돌려줄테니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려달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이 새만금에 와서 이렇게 조개가 많은 것에 놀랐습니다. 이만큼의 조개를 생산할 수 있는 곳이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일본에서 온 동료 중 한 사람은 이 정도 양의 조개를 잡는다면 아리아케 해의 조개는 곧 없어져 버릴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굉장한 양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만큼의 조개를 새만금갯벌은 인간이 이 땅에서 조개의 채집을 시작하고부터 계속 제공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갯벌이 지켜진다면 자식의 대에도 손자의 대에도 아니 미래 영겁 인간이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는 한 계속 생산해 줄 것입니다. 새만금 조사를 하며 가장 의문을 느낀 것은 어떤 마을에서건 어업수입의 겨우 1년분 정도의 보상금으로 인해 미래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새만금갯벌이 막히지 않게 된다면 영구히 계속될 해산물 생산을 강제로 포기하는 일은 1백년분의 보상금을 받아도 모자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바다에 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국가공무원도 대학의 학자도 아닙니다. 새만금 바다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새만금의 어민인 여러분입니다.
 
이바다와 갯벌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가장 잘 안다는 자신을 가지고 의견을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큐슈의 아마쿠사에 있는 양각만(羊角灣)에서는 처음에는 물막이공사를 인정했던 어민이 공사에 의해 예상 밖의 오염이 일어나자 해상시위를 하여 공사를 중지시켰습니다. 또 같은 아마쿠사의 혼도갯벌에서는 ‘갯벌과 돌맹이가 있는 얕은 바다는 물고기의 산란장이며 치어의 산란장이다. 나이든 우리들은 보상금으로 뭔가 될지도 모르지만 뒤를 이을 아이들을 위해서도 이 갯벌은 결코 매립되게 놔둘 수 없다’고 들고 일어서서 사실상 이 공사를 중지시켰습니다.
 
‘아이들과 손자들에게 떳떳하고 싶다. 꼬리 내린 개는 되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이라도 싸우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환경운동단체는 그와 같은 어민이나 지역 사람들의 진짜 생각을 듣고 모두에게 알리는 일을 최우선의 사업으로 해왔습니다. 국가는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매스컴에 어필하였습니다. 환경운동단체는 국내는 물론 전세계의 환경그룹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유사시에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 새만금을 지키기 위해 자식과 손자에게 떳떳하게 살기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이야기가 끝나자 뜻하지 않은 박수가 나왔다. 회의장이 된 방안뿐 아니라 옆방에서도 박수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손씨가 다음과 같은 말로 자리를 정리했다.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바다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내 마음 속에서도 같은 생각이 강하게 솟아 올라왔다.
 
이코마 켄지 / 일본습지네트워크 활동가
번역·정은주 urimoduda@hanmail.net
습지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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