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왜 우리는 다시 거리에 서는가

2021 기후파업에 나선 세계시민들의 목소리
 
2019년 25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열린 스페인 마드리드에 모인 전세계 기후활동가들이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지구의벗
 
기후위기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지난 2년 간 대단한 기세로 진전했다. 우리 시대의 위협을 말해주는 ‘키워드’에서, 하나의 정치·사회적 ‘의제’가 되어 기후위기 문제 해결을 위한 쟁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18, 2019년부터 이어진 일련의 흐름을 톺아보아야 한다. 그 해에 그레타 툰베리로 대표되는 국제적 ‘기후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센 흐름은 기후위기가 국제 사회의 ‘교양 상식’이 된 이래 펼쳐진 가장 큰 규모의 직접 행동들로 이어졌다. 
 

‘기후위기’, 의제가 되다

 
영국의 기후운동 단체인 <멸종저항(DEX)>의  주도로 인류의 멸종을 우려하며 자연사 박물관을 점령한 채, 영국 시민들은 천여 명의 연행을 불사하며 영국 정부를 넘어 전 세계에 경종을 울렸다. 또한 기후위기로 인한 파국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현재 세대’로 존재하는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은 학교를 나와 거리 시위를 주도하는 결석 시위(미래를 위한 금요일, Friday for future)를 이어가기도 했다.
 
2019년 9월에는 20일부터 27일까지 일주일간 약 150개국에서 760만여 명이 참여한 글로벌 기후파업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300여 개가 넘는 환경·노동·농업·인권·종교 등 제 분야의 단체들이 연대한 ‘기후위기비상행동’이 발족하여 ‘921 기후위기비상행동’ 집회를 열었다. 서울을 포함해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로 진행된 이 집회에 참여한 5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외친 구호는 우리 사회에서 다소 생경한 언어였다. ‘정부는 기후위기를 직시하고 비상 상황을 선언하라’, ‘기후정의에 입각한 배출제로 계획 수립하라’, ‘기후위기에 맞설 범국가기구 설치하라’가 그것들이었다.
 

기후위기, 새로운 장을 열다

 
놀랍게도 이 낯선 언어들은 빠르게 정치의 언어, 경제의 언어, 사회의 언어로 확산되었다. 2020년, 우리 국회는 ‘기후위기 비상 대응 촉구 결의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시켰다. 정부도 그린뉴딜 계획을 발표하고 대통령의 시정 연설을 통해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천명했다. 그리고 올해 5월, 기존의 녹색성장위원회, 국가기후환경회의 등을 통폐합하여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위원회’가 출범했다.
 
정부뿐 아니라 시장의 반응도 즉각적이었다. 기업들은 발 빠르게 ‘ESG 경영’을 위시로 한 탄소중립 경영 계획을 발표하고, 친환경 기업의 이미지를 선점하기 위한 홍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주식 시장 역시 이러한 동향에 부합하는 ‘관련주’가 무엇일지 기민하게 탐닉했다. 재생에너지, 수소, 전기차, 신소재 등의 ‘환경 관련주’는 대세가 되었다.
 

다시 거리에 선 시민들

 
 
 
9월 25일 글로벌 기후파업(한국 기후행동)에 나선 시민과 환경운동가들 
 
하지만 올해도 시민들은 다시 9월을 맞아 국제적 기후행동을 진행했다. 전국에서 동시다발 1인 시위가 벌어졌고, 온라인 화상회의 플랫폼을 통해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왜 여전히 시민들은 거리에서 ‘기후위기 대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2019년 세계의 시민들이 부르짖은 외침을 이제는 정치·경제 권력자들이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선언하고 있는데 말이다. 가령, 2019년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요구했던 그대로는 아니지만, 국회와 정부가 기후 비상을 인정했고, 탄소중립 목표를 제시했으며, 대통령 직속으로 탄소중립위원회까지 구성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올해의 기후행동은, 더는 시민들이 기만당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지금 정부와 기업들이 지금은 기후위기 대응을 참칭하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환경을 착취하는 현재의 관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말잔치만 벌이는 녹색 분칠(Green Washing)이라는 것에 대한 강력한 비판인 것이다. 이러한 시민들의 통찰은 두 가지 분명한 근거로부터 기원한다.
 

실패를 목표로 할 수는 없다

 
첫 번째 근거는 목표 자체의 미진함이다. 예컨대 정부의 2050년 탄소중립을 보자.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요구한 ‘배출제로’와 정부의 ‘탄소중립’은 다른 개념이다.온실가스 배출량과 흡수량을 합산해 순배출이 ‘0’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개념인 탄소중립은 주요 배출원의 배출량 자체를 제로로 만드는 배출제로보다 느슨한 목표다. 
 
‘탄소중립’ 목표의 결함은 올해 탄소중립위원회가 발표한 ‘탄소중립 시나리오(안)’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탄소중립은 어떻게든 배출량과 흡수량의 합산 값을 0에만 맞추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흡수량을 많이 늘릴수록 배출량을 덜 줄여도 된다. 그래서 시나리오는 수소와 탄소포집·활용·저장 기술(CCUS)을 십분 준용해 흡수량 전망을 늘려 잡고, 산업계가 그만큼의 탄소를 더 많이 배출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해 준다. 위 기술들이 미처 실현·상용화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또 한편, 한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2050년 내외의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할 때 인용한 것이 IPCC 『1.5℃ 특별보고서』라는 것을 상기할 때, 같은 보고서에서 권고한 2030년 감축 목표(2010년 대비 45% 감축. 현재 한국정부가 기준연도로 삼고 있는 2018년 대비로는 약 55% 감축)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먼 미래의 목표엔 공수표를 날리지만 당장의 노력은 회피하려는 태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더구나, 기후위기 대응은 단지 2050년까지 목표한 것만 달성하면 마칠 수 있는 숙제가 아니라,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억제함으로써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을 막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이다. 그 말인즉슨, 최소한 어느 정도 이상은 온실가스를 더 배출하면 안 된다는 마지노선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탄소예산’이라고 부른다. 현재 인류에게 남은 탄소 예산은 400억 톤 정도이고, 지금처럼 배출하면 약 7년이면 이 마지노선은 무너지고 만다. 당연하게도 언제까지 배출량을 어느 정도까지 줄이겠다는 목표 설정만큼이나, 400억 톤의 전 세계 탄소예산을 각국이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국의 현재 연간 배출량, 누적 배출량, 인구, 경제규모, 감축 여력 등을 주밀하게 판단해서 모두가 공동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지만, 국제사회와 한국 정부는 이러한 작업을 해본 적이 없다.
 
현재와 같은 전 세계의 기후위기 대응 목표를 다 모아놓고 보면, 결론적으로 탄소예산을 초과하고 기후위기 대응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한국 정부의 계획은 그 실패에 크게 일조하는, 대표적인 선진국의 ‘불충분한 목표’다. 권력자들이 짐짓 비장한 투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목표를 계획하고 있는 꼴인 것이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후운동이 거리에 남은 또 하나의 이유는 책임의 주체가 불분명한 까닭이다. 기후위기는 명백하게 현재 진행중인 생태 학살이다. 그러니까, 인류가 쌓아올린 현대 문명의 체제가 제 아무리 복잡하게 얽혀있다 한들, 기후위기는 어떤 인과의 형태로든 피해와 가해가 드러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보면 연간 배출량이 많은 국가들 혹은 산업혁명 이래 많은 탄소를 대기 중에 누적시켜온 국가들이 있을 수 있다.
 
한국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상위 30개 기업이 국가 온실가스의 70% 가량을 배출한다. 대표적으로 국내 1위 배출 기업인 포스코 1개 기업이 전체의 10% 가량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이러한 다배출 기업에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물을지에 대한 한국의 논의는 대단히 빈약하며, 기후위기의 심화로 인해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을 것이며 어떤 비용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본격적 논의도 찾아보기 어렵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고, 어떤 방식으로 그 책임을 부과할 것인지가 부재하지만 정부와 기업은 ‘탄소중립이라는 어려운 길’이라며 먼저 시민들에게 언성을 높인다.
 
위에서 언급한 ‘탄소중립 시나리오(안)’을 예로 살펴보면, 특정 기업을 호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부문별·산업군별로 온실가스 배출량과 배출 전망·목표를 설정하는데, 2050년 각 부문의 배출량이 몇 퍼센트 감소되는지는 나와 있지만 어떤 수단으로 이 감축을 유도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시 말해, 정부의 목표는 있지만 목표 달성의 관건인 다배출 기업들에게 그것을 강제 혹은 유도할 수 있는 대책은 내놓지 못한다는 뜻이다.
 
정부가 강력한 투로 기후위기 대응을 천명했으나 실상은 이렇게 무력한 모습을 보이면, 자연스럽게 공은 기업에게 넘어간다. 결국 기업의 자발적 쇄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코, 현대제철,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등 다배출 기업들이 내놓는 전환 속도는 대개 불충분한 정부 탄소중립 계획에도 미달한다. 그나마 기업들의 감축을 유도할 수 있는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마저 시행 5년이 넘었지만, 기업들의 눈치를 보느라 제 기능을 못해 무용론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기후정의를 말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기에 기후 비상을 모두가 선언한 이때에도 이런 지리멸렬한 상황이 지속되는가. 기후위기가 새로운 논쟁의 장을 열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온갖 미래기술의 방편들로 온실가스 감축이 가능한지 여부는 아닐 것이다. 기후위기는 화석연료에 기반한 채 자연을 착취하는 ‘과잉생산·과잉소비’ 중심의 사회체제와 불가분의 관계다. 실은 진짜 건설적 논쟁은 이 체제를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전환할 것인가이다.
 
다배출 기업들에게 ‘배출의 권리’를 할당하고 그것을 사고팔게 하는 제도는 그것의 유용과 무용을 떠나 책임의 직관성을 흐리게 만든다. 어떤 기업들, 어떤 계층이 기후위기 유발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지, 누가 더 큰 위기에 처해있는지를 드러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좁은 의미의 ‘기후정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9월 25일 1인 시위를 주도한 기후위기비상행동이 내건 “지금 당장 기후정의”라는 슬로건에는 그런 함의가 있다. 
 
탄소중립을 넘어 배출제로 사회를 말하는 것은 왜 불가능하겠는가. 세계에서 11번째로 많은 탄소를 누적시킨 한국의 책임을 통감하는 ‘국가 탄소예산’을 산정하고 다른 선진국들에게도 정의로운 책임을 촉구하는 국제적 기후 리더십은 왜 상상할 수 없는가. 다배출 기업들에게 ‘부담’을 부과할 것을 분명히 하고,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지 못할 때는 막대한 과징금·조업정지 등 직접적 제재를 가하겠다는 의지를 왜 보일 수 없겠는가. 기후위기로 인해 일자리를 상실하거나 생존의 위협에 처하게 될 국내외의 동료 시민들을 찾아내고 이들을 위해 더 많은 재정을 투입하는 일은 또 왜 안 되겠는가. 단순히 기후위기 상황이 시급하다는 피상적 인식을 넘어 선 세계의 시민들이 다시 거리에 선다. 이제 우리도 우리가 존속해온 체제를 정의롭게 전환하는 방식을 함께 상상할 때다.
 
글 / 권우현 환경운동연합 기후에너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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