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의 시 「물빛, 크다」 [볕뉘읽기 102]

물빛, 크다

문인수

물은, 저를 물들이지 않는다
팔이 긴 물풀들의 춤을 한 동작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고
무수한 물들의 앙다문 말을 한마디도 안 빼고 노래로 다 불러낼 뿐
물 아래 맑은 바닥, 어떤 의심도 사지 않는다
 
물은 한결같다는 뜻, 그 힘이 참 세지만 저를 몰고 가는 게 아니다
하늘과 땅이 기울이는 대로 흘러, 적시며 먹이며 쌓이며
거기
아름다운 풍경으로 홀연 나타나 가로되
 
아, 물의 동인(同人)이다, 봐라. 강이며 호수며 바다 바라보는 거대한 순간, 지난날들과 앞날들의 총화가 푸르다!
그대, 어찌 살고 싶지 않겠느냐.
 
저 깊이를 두고 ‘물빛’이라 한다. 그러나 
물은 저를 물들이지 않았다.
 
 
 - 시집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창비, 2015)
 
 
4월 하순부터 열흘 가까이 크게 앓았습니다. 올해가 만으로 60살인 회갑이니까 동양적인 생사관으로 따져보면 삶의 한 주기를 마치는 해에 들어선 셈입니다. 이렇게 크게 아파본 적이 수십 년 만이라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몸이 완치되고 나면 내 남은 삶은 덤으로 살아가는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마저 가져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을 했는데도 몸은 좀처럼 예전의 활력을 찾지 못했습니다. 몸이 자꾸 까구러지고 속이 메슥거리는 느낌을 맛보면서 간신히 후들거리는 다리로 동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 감사하게도 나무와 흐르는 물이 나를 살렸습니다. 아직 봄을 채 떨치지 못한 연두색 나무들을 보는 순간 몸이 이상하게도 큰숨을 내쉬면서 따뜻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뭇길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실개천을 보는 순간 몸이 시원해지면서 편안해지는 느낌을 맛보았습니다. 누가 풀어놓은 것이 아닐 텐데 송사리 같은 것들이 무리지어 빠르게 헤엄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자연이 맑다는, 깨끗하다는 느낌이 이렇게 지쳐버린 내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해보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게 아침과 오후에 한 번씩 동네 공원에 나가 연두색 나무들과 실개천 맑은 물을 바라보면서 몸을 빠르게 추슬러가고 있습니다. 
 
맑게 흘러가는 물이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줄 알게 되면서 물의 신비로운 생명력을 되새겨보게 되었습니다. 군자의 사귐은 담백한 물과 같다는 옛 말의 이치도 다시 돌이켜보게 되었습니다. 흐르는 맑은 물은 자기 것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온전히 드러내주는 모양으로 그것들을 품어줍니다. 상대방을 껴안아주는 그 투명한 이치가 참으로 귀하게 느껴집니다. 자연은 늘 우리에게 그런 존재감을 묵묵히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병든 마음이 그런 존재감과 이치를 외면하고 내쳐왔죠. 물질에 대한 욕망으로 우리 몸과 마음이 혼탁해지면서 맑은 것들을 멀리해버린 결과가 우리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결과를 제 몸이 크게 한 번 체험했던 듯합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혼탁해진 제 몸을 아프게 흔들어준 반성의 기회를 잘 살려보고 싶습니다. 어느 시인의 시 구절처럼 제 몸에는 아직도 자연이 마련해준 금실과 금바늘이 남아있어서 상처 난 몸을 튼튼하게 꿰매줄 수 있다는 믿음을 소중하게 가져봅니다

이경호 문학평론가, 『상처학교의 시인』 저자 leekh7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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