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뉘읽기 18] 전동균의 시 「산 밑 작은 호숫가에서」/ 이경호

산 밑 작은 호숫가에서
                                        전동균


산 밑 작은 호숫가에서 보았지요
이른 아침 흠뻑 젖은 풀숲을 헤치고 가 보았지요
잎 진 엄나무 아래 땅속에서 막 올라오던 새끼 족제비 한 마리
낙엽을 헤치며 두 발 들고 올라오다 눈 딱 마주치고는 깜짝 놀라 숨었다가
조금 뒤 어찌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듯
두리번두리번 고개 내밀던 아, 그 철없는 황갈색 영혼의 몸을

그때 저는 바스락대는 낙엽이거나
오랫동안 숨 멈추었다가
조용히 출렁대는 물결 같은 게 되고 싶었답니다

당신, 제가 숨쉬는 것만으로도 기쁜
당신을 처음 만난 것처럼


-『거룩한 허기』(랜덤하우스, 2008) 중에서
작년 5월 성남시 남서울공원묘지에 모신 아버님 산소를 찾았다가 경이로운 체험을 했다. 아버님 산소는 공원의 외곽지역 경사가 급한 곳에 모셔져 있었다. 산기슭을 돌아 비탈진 곳으로 오르려는 순간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커다란 짐승 한 마리가 아버님 산소 왼쪽의 풀숲에서 튀어나와 언덕 너머로 종적을 감춰버린 것이었다. 불과 이십여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내 시선에 어른거린 그것은 고라니였다. 나보다 뒤쳐진 가족 일행이 당도하여 내가 목격한 것을 들려주었으나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버님 산소를 그곳에 모신 지 이미 이십오 년이나 되었어도 그런 짐승을 목격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공원묘지가 자리 잡은 그 지역이 분당의 아파트촌으로 변모해버린 터라 가족들의 불신을 무어라 탓하기도 어려웠다. 어쩌면 그 고라니는 야생이 아니라 근처 농원에서 우리 밖으로 뛰쳐나온 사슴이나 노루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조성된 죽음의 자리에서 커다란 야성의 생명체와 마주친 체험이 안겨준 놀라움과 신기함은 지금까지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전동균 시인도 그렇게 “산 밑 작은 호숫가에서” 마주친 생명체에 대한 경이로움을 절실하게 토로한다. 그것은 내가 마주친 짐승보다는 작고 어린 것이다. 오히려 작고 어리기에 그것은 경이로움을 넘어서 자연의 순수함과 천진함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을 보고서도 경계심이나 두려움을 접고 “두리번두리번 고개 내밀던 아, 그 철없는 황갈색 영혼의 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시인으로 하여금 사람의 자취를 지워버리고 싶도록 만든다. “그 철없는” 생명의 순수함이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본래의 모습대로 지켜질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저는 바스락대는 낙엽이거나/오랫동안 숨 멈추었다가/조용히 출렁대는 물결 같은 게 되고 싶었답니다”라는 고백은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생명에 대한 그리움과 경외감으로 확산된다. “당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모든 생명을 태어나게 한 어머니이기도 하고 우리가 늘 사랑하고 싶은 연인이기도 하다. “숨쉬는 것만으로도 기쁜” 생명현상의 축복을 우리에게 나누어주는 존재야말로 우리의 근원적인 어머니이고 연인인 자연인 것이다.    

이경호 leekh724@hanmail.net
문학평론가, 『문학의 현기증』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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