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에 대한 묵상

 
“새와 같이 자고 새와 같이 깨어나라.”
이 서양 속담은 오직 근면이 미덕이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많이 잡는다.”
이도 농경시대를 증언하는 서양 속담임은 물론이다.
“당신이 새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벌레를 잡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만일 당신이 새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라.
하지만 만일 당신이 벌레라면
아주 늦게 일어나야 하겠지.”
이는 쉘 실버스타인의 ‘일찍 일어나는 새’라는 시다. 한갓 미물인 벌레에게도 연민의 시선을 던지는 시인의 마음은 얼마나 따스한가? 또한 해학적인가?
 
“신은 어디나 날아다니는 새와 같다.”
이는 리그베다에 실려 있는 잠언이다. 창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새는 인류의 오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인간이 부러워한 유일한 대상이었기에 신의 표상으로 손색이 없었을 터이다.
“나는 본래 천상의 새였으니(我本天上鳥)
언제나 오색구름 속에 머무르리라(常留五綵雲) 
김삿갓의 자긍심이면 납득될까? 새를 신성시한 심리기제를 말이다.
“오늘 여기 모인 살아 있는 것들아,
땅에 사는 것이나 공중에 사는 것이나
모두들 행복하라.
그리고 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숫타니파타의 말씀에 귀 기울이노라면 절로 떠오르나니 프란치스코다. 프란치스코 일행이 골짜기를 지날 때 온갖 새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일행을 떠나 자신을 기다리는 새들에게 갔다. 새들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동무들아 너희는 마땅히 너희를 지으신 창조주를 사랑하고 찬미해야 한다. 그 분은 깃털로 옷을 입히시고 날개로 날게 하시고 필요한 것을 주셨다. 가장 고상한 피조물로 지으셨고 깨끗한 허공에 깃들게 하셨고 씨 뿌리거나 거두지 않는데도 먹이시어 아무 염려하지 않게 하셨다.”
새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날개를 퍼덕이며 벌어진 입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프란치스코가 십자 성호를 그어 축복하고 돌아가도 좋다고 하자 각자 날아갔다. 프란치스코는 새들이 겸손하게 하느님을 경배함을 보고서 기쁨의 감사기도를 드린 다음 떠났다.
절에 걸려 있는 운판(雲板)이라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늘을 나는 생명이나 허공의 영혼을 위한 소리 공양의 뜻이니 말이다. 
새와 관련해 상징적인 문화재로는 전남의 3대 길지라는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노고단의 마고(麻姑)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는 전설이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이라 불린다. 운조루라는 명칭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출전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허리에서 나오고(雲無心而出岫)
새는 날기를 지쳐 돌아오도다(鳥倦飛而歸還)
새 문화재의 압권이라면 ‘出’자형 금관이다. 거기 앉아 있는 새는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한다는 영매(靈媒)다. 스키타이 황금문화의 복사판이라는 사실이다. 독수리에게 시신을 먹이는 조장(鳥葬)도 죽은 이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뜻임은 물론이다.
 
새는 문화인류학에서 대단히 폭 넓은 의미의 범주를 지니는 상징물이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초월, 영혼, 신의 나타남, 공기의 정령, 영혼의 승천, 의식의 고양상태에 이르는 능력, 큰 새는 태양신 또는 천둥신 또는 바람의 신과 동일시, 큰 새의 혀는 번개, 한 그루에 앉은 두 마리의 새는 이원성의 상징.”
중국에서는 꽁지가 짧은 새는 추(?)라 했고 긴 새는 조(鳥)라고 했다. 새와 관련한 한자는 다음과 같다.
집(集)-새 떼가 나무 위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모이다’의 뜻이 된 글자
리(離)-원래는 꾀꼬리를 뜻하는 글자였다. 꾀꼬리는 가을철에 떠난다고 하여 이별의 뜻으로 변했다
쌍(雙)-두 마리의 새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양에서 한 쌍을 뜻함
잡(雜)-새의 날개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어 ‘섞이다’의 뜻이 된 글자
난(亂)-진흙탕에 빠진 새는 날아가기 어렵다는 데서 곤란의 뜻이 된 글자
아(雅)-갈가마귀의 어금니(牙) 부딪는 소리가 맑다 하여 우아하다는 듯이 된 글자
명(鳴)-수탉이 주둥이 벌려 우는 모양의 글자
학(鶴)-높이 날아가는 새라는 뜻
계(鷄)-유달리 벼슬이 커 보이는 새라는 뜻
 
“새와 나무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일을 하는가? 새가 없다면 가벼움과 비상에 대한 인식과 인상을 얻을 수 없었고 도약에 대한 의지도 없었고 우리의 삶은 무겁고 무거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정현종 시인이 장욱진 화백의  「나무와 새」 그림을 본 소감문이다. 무엇보다 새는 나무(숲)의 즐거운 안내자이고 행복한 설교자이다. 명랑한 대변인이자 다정한 해설가이기도 하다. 만약 새가 없다면 나무는 누구를 통해 비상의 꿈을 꾸고 천상의 음악을 청해 들을 수 있으리오?
노아의 방주에 ‘선’이 타려 하자 하느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짝이 있어야 탈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는 ‘선악’이 함께 존재하게 되었다는 거다.
이제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선’이라면 갉아먹는 벌레는 ‘악’이고 벌레를 잡아먹는 새는 ‘선’이라 할 수 있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나무와 벌레, 벌레와 새는 상극이라면 나무와 새는 상생이다.
 
이처럼 생태계는 상생(공생)과 상극(먹이사슬)을 통해 고도의 조화가 유지되는 균형세계다. 합목적적인 음양오행설만큼 바람직한 환경철학이 그 무엇이겠는지?
좌우지간 새와 나무만큼 불가분리의 밀접한 사이도 달리 없다. 나무가 없다면 새는 어디에, 그 무엇으로 둥지를 지을 것이며 새가 없다면 나무는 무슨 수로 자신을 갉아먹는 벌레를 퇴치할 길이 있겠는지?
 
이렇듯 새와 나무는 상호 절대적인 의존관계에 있지만 나무가 새를, 새가 나무를 속박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 이청준은 밀접한 관계에도 서로 구속함이 없는 완벽한 자유의 인간관계를 그린 「새와 나무」라는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이 실린 연작집 『남도사람』의 ‘후기’를 덧붙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존재적 언어와 관계적 언어질서를 조화롭게 통합하는 총체적인 언어(삶)질서의 꿈을 꾼다. 그건 새와 나무의 꿈이다. 나무의 삶은 자족적으로 고유의 생명 실현과정일 뿐이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울창한 나무에 낭자한 새들의 노래소리로 새와 나무가 하나의 삶으로 어우러지는 그런 사랑의 나무를 꿈꾼다. 그게 내 소설로 꿈 꿀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힘찬 삶의 나무 또는 자유와 사랑의 빛인 나무인 것이다. 새와 나무의 관계에 대한 행복스런 꿈이 그리고 나무 쪽 삶에 대한 무력하나마 허심탄회한 꿈이야말로 저간의 언어질서를 기초로 한 생명과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문학적 확인이라 믿는 까닭이기도 하다.”  
 
 
황인용 / 수필가, 환경운동연합 회원
일러스트 / 김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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