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림 60] 끝의 시작

 
병원에서 내 피 같은 피를 6통이나 뽑고 3시간째 대기하고 5초 진료를 받았다.
 
기다리고 실망하고 놓치고 후회하는 게 내 인생 같다. 오늘 집에 돌아가 산문집을 마저 써야한다. 노트북이 무거워 핸드폰 메모장에 몇 줄 썼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인데 쓰다 지우고 다시 쓰니, 수신자도 발신자도 나다. 수취인불명이 되는 것보다 나으려나. 병원 데스크에 여승 한 분이 서 계신다. 무척 마른 체형에 승복이 갑옷처럼 무거워 보인다. 침착하고 예의 바른 몸가짐으로 관계자 설명을 듣고 계시는데 얼핏 들으니 스님은 암환자다. 병원에 오면 침착한 환자가 별로 없다. 문제 많은 대학병원 시스템과 질병으로 성마른 환자들이 많다. 
 
오늘 본 스님의 쾌유를 빈다. 글 쓰고 그림 그릴 정도만 간신히 내게 허락된 체력으로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면,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비는 일이다. 나도 당신도. 
 
나는 20년 가까이 투병 중이고 오늘 처음으로 신약을 처방받았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볼 거란다. 일단 무릎을 구부릴 수 있고 전신 통증이 완화된다.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고, 덜 아프면 좋겠다는 단순한 바람만 있다면 신약도 나쁘지 않다. 병이 아니라 약이랑 싸우는 느낌이 날 지치게 하지만 남부럽지 않게 경험한 불행에도 웃고 있으니 독한 내가 언제쯤 한 번은 이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울고 싶으면 실컷 울라는 말과 하나님께 애원하는 말, 친구들의 말에 위로받았다. 
 
달라진 환경에 부지런히 적응해야겠다. 신약이 내게 준 건 드라마틱한 효험이 아니다. 유효한 시간, 그 시간을 나 대신 벌어준 거다. 불행이 변주할수록 나는 진화하는 다분히 건설적인 모습으로 신약이 벌어준 시간을 살자꾸나.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건 따뜻한 햇볕이라고 옛적에 읽은 동화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옛이야기는 나이가 들수록 서사의 의미가 뚜렷하게 느껴진다. 어제는 마음이 복잡했는데 오늘은 웃는다. 웃는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지만 문제가 객관적으로 보인다. 그러니 내 우중충한 시련의 외투를 벗기는 건, 비장한 각오나 결심이 아니라 따뜻한 볕 한 줌 같은 웃음…. 이라고 쓰려고 했는데 뭔가 간지럽다. 
 
할머니께서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뱅이로 산다고 경고하셨는데, 하나만 아시고 둘은 모르신 거다. 고통을 견딜 아이템을 모을 수 있는데, 아셨다면 좋았을 텐데. 모쪼록 오늘, 날 웃기려고 노력해준 친구들 고마워. 나도 물리적인 힘으로 낡아지면서 동시에 귀한 순간을 살고 있으니.
 
글・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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