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텍스트 169]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동물이 된 사람

 
삼년 전 여름, 여덟 살 된 진돗개가 집을 나갔다. 저녁이 다 될 때까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를 사랑하는 남편은 하얗게 질려서 곧장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간신히 밥이나 주면서 인간의 도리를 면피해오던 나는 남편과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아니다, 그건 좀 비겁하다. 싫어하기도 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무섭고 싫었다. 인간의 말을 하지 않고 짐승의 울음을 울거나 사납게 짖어대는 것 역시 무섭고 싫었다. 나는 그가 따뜻한 햇볕 아래에 무심한 표정으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순식간에 날아오르듯 튕겨나가서 새를 낚아채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다. 죽은 새를 이리저리 굴리며 장난을 치는 게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다. 새에게 그럴 수 있다면 인간인 나에게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개와 함께 산다’는 의식이 희박했다. 혹은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분명 그때 나의 시선은 상당히 폭력적이었다. 우리 집 개에게 야생성이 있다면, 나에게는 야만성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그의 가출은 나를 좀 멍하게 만들었다. 그가 오늘 밤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내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밥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깔깔거리고, 마당의 볕을 쬐며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이기적이게도 나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결론만 말하면, 그날 밤 어둠이 내린 공원에서 그는 발견되었다. 남편과 나를 향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반기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무섭고 싫기만 했던 개가 그 순간 갑자기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생각을 해보았다. 그의 야생성과 인간 친화적인 사회성에 대해서, 예민함과 충직성에 대해서, 목줄 없이 차도를 건너고 초등학교 운동장을 떠돌고 어두운 공원으로 향하는 길 잃은 개의 위기에 대해서. 
 
『그럼, 동물이 되어 보자』는 울타리 안의 개가 되어 보는 종류의 실험을 넘어선다. 동물의 삶에 대한 본격적 ‘역지사지’인데, 맨몸으로 직접 자연에 뛰어들어 정말 오소리로 살고, 수달로 살고, 사슴으로 산다. 오소리로 살기 위해서 웨일스의 황무지에 직접 굴을 팠고, 지렁이를 먹고, 네발로 언덕을 기었다. 수달이 그러하듯 포스터 역시 강에서 바다로까지 나아갔다. 사냥 당하는 사슴의 입장이 되어 블러드하운드에게 쫓겨보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의 실험은 실패를 향한 질주였다. 설령 이 실험이 끝난 다음에 포스터가 지렁이 미식가로 거듭났다고 한들 그는 오소리의 기분을 모르고 오소리가 밤에 어떤 꿈을 꾸는지 모른다. 사냥개에게 쫓기는 동안 그는 숲의 깊은 곳을 향해서 내달리는 사슴과는 달리 탁 트인 곳, 사람의 흔적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결국, 동물이 되어 볼 수는 없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이 극단적이고 황당한 실험에 분명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포스터의 시도는 인간의 세계가 자연과 분절되어 있지 않다는 당연한 명제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또한 인간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이 내재되어 있음도 확인한다. 그런데 나는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맺음말에 주목한다.
 
“내가 늘 자연 속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웨일스 언덕에 오소리가 잠들어 있고, 록퍼드의 깊은 물속에서 수달이 돌을 뒤집고 있으며, 칼새가 (…) 인간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통해서만 비슷한 종류의 위안을 받는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그 두 가지 마음이 버젓이 공존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위안이 된다. 이쯤이면 이런 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 더 나은 동물이 되어 보자!  
 
 
글 / 조은영 무가지로 발행되는 서평 전문 잡지 『텍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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