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05] 한권의 책 읽기

한 권의 책읽기 - 『지구는 우리의 조국』


암울한 지구진단서
심재상/시인·관동대 불문학과 교수

학부생이었던 70년대에 우연히 읽게 된 로마클럽 『동경보고서』의 충격을 나는 아직도 생생
하게 기억한다. 이 보고서는 과학만능주의, 기술만능주의의 장미빛 환상과 손을 잡은 채 우리
모두의 삶을 휘몰아가던 진보와 발전의 신화들에 대해 내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의혹과 미심
쩍음에 최초로 결정적인 형태를 부여해준 구체적이고도 총체적인 지구진단서였다. 물론 세월과
더불어 이 보고서의 사뭇 어두운 전망과 예측들 중의 상당부분들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온갖 불확실성을 머금은 채 용틀임치는 우리 시대의 복합성을 온전히 포착해낼 수는 없었던 것
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난 93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바 있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문명비판가인 에드가 모랭(Edgar
Morin: 1921∼)이 같은 해 발표한 『지구는 우리의 조국(원제: Terre-Patrie)』은, 그 개방적인
시각이나 방법론에 비추어볼 때, 우리 시대가 제출할 수 있는 최상의 지구진단서라 할 만하다.
이 책은 우리의 유일한 조국인 지구와 그 속에서의 삶에 대한 경탄과 탄식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고, 방법적 사랑의 책무를 뜨겁게 일깨워준다.

모랭은 파리의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 대학에서 역사와 지리,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므
로 대학에서 ‘정식으로’ 사회학을 배운 사람은 아니다. 정통 사회학의 연구영역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거나 그 영역들을 훌쩍 넘어서는 그의 주변적이고 개방적인 사유도 이와 무관하
지 않을 듯 싶다.
모랭의 정신적 궤적은 그의 최초의 두 저서 사이에서, 다시 말해 격변하는 현재에 대한 성찰
(『독일의 영년』)과 인류사회학적 탐구(『인간과 죽음』)의 두 축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영
화사회학(『영화 혹은 반상상적 인간』)과 스타시스템(『스타』)의 신화적·발생인류학적 고찰,
대중매체의 비판적 분석(『시대정신』), 스탈린주의를 통한 세계의 야만과 개인의 내적위기에
대한 성찰(『인간정치학 입문』), 유언비어의 사회학(『오를레앙의 소문』), 돌발적인 사회현상
의 검토(『68년 5월 : 돌파구』), 새로운 인간학의 모색(『잃어버린 패러다임』) 등등의 다양한
작업들을 통해 그는 문명 속의 야만과 현대 속의 고대성을, 이성이 머금고 있는 광기를 드러내
면서, 그것들이 떼어낼 수 없게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줄기차게 보여준다. 그 정신적 궤적은
가히 심화와 확대, 통합의 궤적의 전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어서, 어느덧 사회학의 제한된 영
역을 넘어서서 인류학, 정치학, 물리학, 생물학, 인공두뇌학, 생태학 등의 온갖 학문을 꿰뚫으며
그것들을 상호결합시키는 특유의 방법론을 구사하고 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총체적이고 총
류적인 새로운 ‘인간학’의 정립이다.
그의 사유, 그의 방법론은 무엇보다도 현실의 복합성(그것은 곧 모든 현실이 지니고 있는 불확
실성과 개연성, 가능성, 모순의 총합이다)에 대한 깊은 인식에 입각해 있다. 모랭이 일차적으로,
인식론을 규명하는 사회학자로 분류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는 근대 서구의 지식체계를 떠
받들고 있는 편협한 인식론적 체계들, 즉 모랭이 ‘분리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 이성중심적
이고 합리주의적인 체계들은, 그것들이 분리적/환원적/절단적/일차원적 사유에 입각해있는 까닭
에 인간의 참모습이나 삶의 제반현실을 제대로 이해·설명해 낼 수 없다고 여긴다. 인간은 실제
삶 못지않게 상상적 삶을 구가하고 이성 못지않게 광기를 내뿜는 ‘호모 사피엔스-데멘스’이
다. 그가 현상의 복합성에 대응할 수 있는 ‘통합의 패러다임’ 혹은 ‘복합성의 패러다임’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서로 부르고 호응하며 하나의 거대한 상호텍스트를 형성하고 있는 모랭의 모든 글들은 분리적
사유의 거부, 환원적 사유와의 투쟁의 결과들이다. 그러한 정신은 이 책에서 그가 자기 자신에
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제안하고 있는 두 개의 영속적인 규범으로 극명하게 명제화되고 있다:
“규범 1. 결합적인 모든 것을 위해 일할 것, 분리적인 것에 대항하여 싸울 것. 규범 2. 구체적
인 일반성을 목표로 할 것.”
이 책은 우리 지구의 역사 전체에 대한 거대한 통시적 고찰인 동시에 지금 지구에서 펼쳐지고
있는 온갖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현상들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다. 전체와 부분, 대상과 주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그 고리들을 포착 설명해나가는 그의 ‘다안적(多眼
的) 시각’의 풍요로움,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가장 큰 힘, 설득력의 원천이
다. 그가 경탄스러울만치 생생하게 보여주는, 참으로 긴 세월동안 이루어진 지구의 역동적인
‘자기조직’ 과정은 아름답고 숭고하기까지하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우리 ‘지구시대’의 대차대조표는 정녕 암울하다. 우리의 시대,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는 이 첨단의 시대는 전례없는 야만의 시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양차대전을 통
한 수천만의 살상과 그 이후의 각박한 현실들, 동서 양진영의 냉전, 아프리카·아시아 신생국가
들의 정치·경제·사회적 재난들, 선진국과 후발개도국 사이의 긴장과 갈등, 개발에 따른 저개
발의 확산, 환경과 생태계의 파괴, 동구의 붕괴와 팍스 아메리카...
우리의 삶은 세계화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정치의 위기, 경제의 위기, 생태계의 위기, 죽음과
무(無)의 위기가 세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위기에 처해있는 시대, 그 위기 속에
서 그리고 바로 그 위기를 통해 변화해 가고 있는 이 시대, 위기는 더 이상 과도기적인 현상이
나 과정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존재양태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구원이란 없다’고 모랭은 말한다. 절대적 구원, 절대적 미래에 대한 모
든 약속은 우리를 맹목과 예속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를 총체적으로
반성함으로써 모랭이 긍극적으로 도출시키려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미래의 유일한 대안일 수
도 있는 ‘인류’라는 개념이다. 사실 인류공동체라는 개념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역설적
이게도 바로 우리의 삶을 뒤덮고 있는 이 맹목적인 죽음의 힘, 이 절망적인 무(無)의 체험이다.
지구는 우리가 살아가야할 유일한 조국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와 죽음의 인식으로부터 희망과 사랑의 원천을 길어올리는 것이야말로 모랭적 사유,
모랭의 윤리학의 경이로움이다. 그의 복합적 사유 안에는 이성/광기, 현실/신화, 인간/자연이 상
호소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죽음/삶, 절망/희망도 구체적으로 상호교류하는 열린 회로를 이루고
있다. 불확실성으로 그득한 미지의 삶, 무와 직면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사랑, 힘들지만 포기할 수 없는 방법적 사랑이라고 모랭은 말한다. 그 목소
리는 뜨겁다.
은 이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3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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