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0] 한권의 책읽기 - 『간디의 물레』/ 유정길

한권의 책읽기 - 『간디의 물레』


가난하게 사는 사회만들기
유정길/한국불교환경교육원 사무국장



지난 7월 나는 슈라마다나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두번째 인도를 방문했다. 스리랑카에서 시
작된 슈라마다나운동은 깨달음을 세계화하고, 다양한 사상적 깊이를 갖는 운동이면서도 특
히 “빈곤도 부정하지만, 풍요도 부정한다”를 기치로 토착문화를 파괴하지 않는 지속가능
한 개발의 전형으로 녹색운동가들이 높이 평가하고 있는 운동이다. 내가 한 일은 이 슈람단
캠프에 직접 참여해 마을개발작업에 동참하는 일이었다. 가장 더운 시기에 그들과 똑같이
먹고 자면서 마을의 우물이나 목욕탕 및 주택보수작업을 하는 일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
다.
그곳은 대부분 우리나라의 황토와 같은 흙이어서 그대로 파내 이겨 담장과 벽을 만들기도
하고 초벌로 구워 기와를 만들어 사용한다. 또한 부서지면 그대로 흙으로 돌아가 아주 자연
에 맞는 주택재료였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인도의 대도시인 캘커타를 비롯하여 큰 도시조
차 시내에는 소나 돼지 등의 가축들과 새들이 사람에 놀라지도 않고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
는 것이었다. 힌두교도들은 육식과 술을 하지 않고 사람도 짐승들에게 특별한 살심(殺心)을
품지 않아 사람과 동물이 어우러져 자연스레 사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내가 더욱 주목했던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에너지였다. 석유나 전기를 사용하지 않
고 있으며, 음식을 조리하거나 짜이(인도 전통차)를 끓여먹는데 유일하게 사용되는 것은 소
나 가축의 똥을 지푸라기와 이겨서 담벼락에 가득 붙여놓고 햇볕에 바짝 말린 것이 전부였
다.
캘커타의 하우라역은 어마어마한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인도는 하수구개념이 없는 듯했다.
기차역 레일은 온통 똥과 오물투성이였다. 이 상황은 평소에 내가 상상하는 ‘더럽다’는
생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또한 인도에도 일회용품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나뭇잎
으로 만든 접시와 초벌로 구운 일회용 짜이 잔으로 한번 먹으면 깨뜨려버리는 것이다. 버려
도 지저분해진다는 것 말고는 자연에는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어
쨌든 그들은 함부로 버린다는 것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명의 탈을 쓴 야만, 야만으로 치부된 문명
언젠가 유럽과 구미를 방문하면서 그들이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벌이고 있는 자원재활용
운동, 에너지 운동 등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린피스나 지구의 친구들, 시에
라클럽 등 서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환경운동단체의 역량과 경험은, 다소 후발에서 노
력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큰 배울거리였으며, 그들의 시민의식과 참여의식을 보면서 우리는
언제나 저렇게 될까하는 부러운 생각이 들곤 했다.
학문과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깨끗하고 정돈된 삶을 사는 그들의 모
든 것은 역시 문명화되어 있고, 앞에 소개한 인도는 그에 비하면 멀어도 한참 먼 미개한 국
가임에는 틀림없다고 보여진다. 경제적 관점, 성장과 문명, 과학기술과 자연이용의 수준으로
보자면 분명 유럽과 구미의 국가는 앞선 나라이다. 그러나 생태적 관점으로 보면 완전히 달
라진다. 지구를 이토록 위기에 이르게 만든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문명화하고 경제성장과 기술개발에 항상 앞서왔던 그들의 자원소비가 이토록 인류를 절멸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원인이 된 것이다. 어쩌면 자원재활용운동이나 환경운동조차도 환경오염
을 막는다고는 하지만 결국 서구문명화를 이끌고 성장지향적 논리를 오히려 메꾸어주고 견
고히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위기를 앞당기는 한 요인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그토록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못살고 있는 인도인들은 문명국에 의해 열등한
민족으로 평가될지 모르지만, 그들의 가난한 소비덕분에 오늘날 지구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
다. 10억의 인구가 석유나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말린 소똥만으로 생존하고 있기 때문
에 선진국의 그 많은 자원소비에도 불구하고 지구가 파괴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게 된 것이
다.
인도인들이 아무렇게나 버리는 일은, 난분해성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대체 버리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쓰레기란 본래 없는 것이
다. 버릴 수 없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환경운동이 개량화되거나 관리주의화되는 것은 바로 위기문제를 해결의 관점이 아닌 단지
사회운동의 하나의 이슈로 생각하는 것이며, 이것은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환경파
괴적 산업사회의 구멍을 메워주며 산업사회를 유지하게 만드는 그럴듯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이다.

생태적 사고; 뒤집힌 세계를 바로세우는 일
7월 말경 그동안 녹색평론이 나올 때마다 보아왔던 김종철 교수의 글을 한데묶은 『간디의
물레』라는 책을 정말 오랜만에 한가로운 마음으로 일요일 아침부터 밤까지 줄을 쳐가면서
보았다. 이미 김교수의 글은 잡지나 다른 글을 통해서 보아왔고 많은 부분 동의하고 있지만,
그토록 정성스레 줄을 쳐가면서 읽은 이유는, 스스로 아직 생태적 사유가 일관된 체계를 갖
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나에겐 다시 생각을 정리하는 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바로 위와 같은 상황을 떠올리게 되었다. 생태적 관점에서 문명화되었
다는 것은 오히려 야만이며 수탈을 의미한다. 또한 오히려 과거 야만적이라고 비난받았던
제3세계나 폴리네시아, 아프리카나 동남아, 인디안들의 문화는 그것이 자연의 결에 조응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인도인 1백여명이 소비하는 에너지를 미국인 한 명이 소비하는 것이 과연 문명인가? 직선적
인 수직상승, 선형적인 발전과 자기중심적이고 탐욕스런 문명이야말로 야만이며, 더럽고 지
저분하지만 공동체적이고 자연친화적인 그들의 삶이야 말로 진정한 문명화가 아닐까. 우리
가 부러워하고 있던 깨끗하고 우아한, 그리고 소비적인 유럽과 미국의 생활양식과 고에너지
소비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환경운동은 단지 개인들의 양심을 위로하는 소재일 뿐 실질적인
해결을 주지 못한다.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선택하고 자연친화적인 삶과 그러한 사회구조를 만드는 일을 선택하
지 않으면, 환경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반환경을 도모하는 것일 뿐이다. 경제개발논리는
이익과 이윤동기에 근거하는 것이다. 계급적 관점이라는 것도 결국은 특정계층의 ‘이익’
을 도모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결국은 산업사회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한때 아메리카를 발견한 사람이 컬럼버스라는 것과 미국의 ‘서부개척자 정신’은 인디안의
관점이 아닌 미국인의 관점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다. 지금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떠오른
생각은 이러한 논법처럼, 우리가 문명화되었다는 것은 역시 인간의 관점이며 더욱이 잘 사
는 선진국의 입장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개척자라고 미화된 표현 속에 무수한 인디
안의 살육을 덮어버렸고, 문명화라는 언어 속에 수많은 동물과 식물, 흙과 물, 생명들의 죽
임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컬럼버스가 달걀을 세우는 것에 그토록 감탄해마지 않으면서부터 이미 그들
의 논리에 저도 모르게 홀린 것인지도 모른다. 달걀은 먹는 것이지 세우는 것이 아니다. 자
연의 질서에 위배되면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는 서구문명의 과도한 호기심과 탐욕, 정복욕
구는 바로 스스로의 묘혈을 만든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인 ‘간디의 물레’라는 표현 속에 모든 생태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간디를 생
각하면 항상 물레에서 실을 잣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인간규모의 기술사용과 자
급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그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간디의 운동은 자신을 지배
하고 있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만이 아니라 영국으로 대표되는 산업사회의 논리로부터 독립
되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보다 더욱 도덕적으로 우월한 가치
위에서 그들은 안타까와하면서 인류 미래의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간디의 물레는 인간심성의 교육에 알맞는 수단이며,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결합시키는 것
이고, 자급적, 자립적인 삶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거대주의적 기계문명을 거부하고, 자기충
족적인 소농촌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가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채택한 무저항 비폭
력운동은 단순히 전술이 아니라, 인간의 참다운 해방을 위한 것이며, 자신을 억압하는 상대
를 오히려 안타까와하는 구원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섬김과 보살핌, 여성성의 사회로
기술문명은 곧,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파악하고 개조할 수 있다는 오만함의 표현이다. 이것
이 바로 인간 속에 지배와 권력의지를 낳게 만들고, 최근 노화문제나 유전자 복제, 게놈프로
젝트처럼 영원히 죽지 않으려는 탐욕으로 연장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만져지고 보이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유물주의가 바탕이 되고 있고 이윤추구와 상업
주의를 낳았다. 결국 상승지향적인 성장주의 문화는 물질적으로 앞선 것에 대한 선망과 뒷
선 것에 대한 비하의식을 초래했고, 결국 토착문화를 상실하게 했다고 한다는 것이다. 물질
중심적 성장지향성은 결국 도시화를 촉진하고, 자립의 기반인 농업을 파괴하기에 이른 것이
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인간에게 의존하는 공동체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더욱 기계에 의존
하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성장지향주의는 경쟁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필연적으로 나와 남
을 구분하고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며 서로를 죽어 나가는 죽임의 기계덩이, 루돌프 바로의
표현처럼 ‘자기절멸의 메가머신’이 되고 만 것이다.
김종철 교수는 이러한 절멸의 악순환고리를 벗어나는 것은, 거세게 감싸고 있는 죽임의 순
환을 벗어나 해방구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농업을 기반으로 한 자립사회
이며 나아가 농촌공동체의 회복이고, 단순한 자유와 평등을 넘어서 ‘섬김’과 ‘보살핌’
의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인연처럼, 나와 남, 나와 자연과 우주가 서로 상호연관되어 있음을 체득하며 자
연을 공경하고 보살피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여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작은 나락 속에 우
주가 들어있는 이치를 통찰하는 것처럼, 과학과 합리성과 이성을 지향하는 현재의 감수성을
넘어서서 깨달음과 영성, 나아가 자연 속에서 이치에 조화롭게 하는 것(道)을 터득해야 한다
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성장, 정복의 ‘남성성’의 사회에서 조화와 감성이라는 ‘여성성’의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의 생명이 생태계순환 속에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타자의 존재가 필수적인 것
이다. 상호간의 의존과 희생없이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
생을 전제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 생명은 물과 공기, 햇빛과 별 등 우주의 모든 것의 도움
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위기로서의 환경문제는
어쩌면 오염을 정화시키도록 인간에게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와 깨달음을 찾으
라는 전인류적 메시지 아닐까?
이 책에는 각 장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용어(메시지)들이 있다. 그래서 중간 후반부터는 자
칫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가 강조한 근본적 문제제기는 지금의 환경운동에 보다 더
많은 사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동강댐문제나 그린벨트해제, 시
화호오염과, 새만금갯벌 등 온갖 문제들이 자행되고 있다. 현실의 문제를 대응하고 있는 많
은 환경운동은 아직도 이러한 근본문제에 동의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의 노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생명운동 속에서 근본적
인 메시지는 현실적 대응을 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논리로 융화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
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메꾸어야할 과제인 것이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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