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疏)와 간(諫)

지난 6월 16일, 한국수력원자력(주)은 정부의 고리1호기 폐로 권유를 수용해 2017년 6월 고리1호기를 영구정지시킨다고 결정했다. 후쿠시마 이후 시민환경단체들이 ‘생활세계를 위협하는 가장 거대하고 일상적인 위험’으로 고리1호기를 지목하고 폐쇄운동을 펼쳐 온 데 따른, 한국 탈핵운동사의 기념비적 승리가 이뤄진 것이다. 

 
그 승리 뒤에 잊어서는 안 될 위험한 결정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똑같이 낡았고 더 위험한 ‘월성1호기’의 수명연장이 지난 2월 27일 새벽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날치기 통과됐던 것이다. 월성1호기가 위치한 경주 양남면 주민들이 ‘상여시위’를 전개하고 한 달 이상 원자력안전위원회를 찾아 상경해 환경연합 등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펼친 헌신적인 시민행동이 무시된 것이다. 주민들은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5월 13일, 경주 지역 18개 시민사회단체들과 주민들은 원안위의 월성1호기 재가동 결정을 ‘지역 주민과 시민사회의 여망과 호소를 무시한 일’로 규정하고 ‘월성1호기 폐로를 위한 만인소(萬人疏) 운동’에 돌입했다.
 
지난 7월 13일 끝내 서명자 1만 명을 넘기면서 재현한 ‘월성1호기 폐쇄 만인소’는 조선조에서 발생한 최초의 만인소(1792년) 이래 역사상 8번째 만인소가 됐다. 월성1호기 폐쇄 만인소를 박근혜정권이 ‘즉각 수용’할 것이라 보긴 어렵다. 7월 22일 확정된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기존의 11기 원전 증설 계획에 원전 2기를 추가해 2029년까지 총 13기의 원전을 건설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월성1호기 폐로를 위한 경주 탈핵 만인소’ 운동처럼 지역 주민들의 헌신적인 탈핵운동이 가진 폭발력을 무시할 순 없다. 고리1호기 폐쇄의 과정을 살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고리1호기 폐쇄운동의 성공은 지역의 여론을 여와 야,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 ‘폐쇄’로 결집시키고, 이를 지역 정치권이 의제로서 받아 선거공간에서 심판을 받도록 만드는 시민운동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경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1만 명의 시민들이 ‘낡고 위험한 핵발전소 폐쇄’에 연명했다. 누가 누구인지 한 눈에 알거나, 한 다리만 건너면 알 수 있는 사회에서 자기 이름을 내걸고 ‘핵발전소를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내년이면 총선이고 내후년에는 대선이 있다. 경주 시민사회가 만인소의 성공을 지역의 탈핵 여론 심화와 확대의 계기로 만들어가고. 전국 시민사회가 이들을 지지한다면 양대 선거공간에서 ‘월성1호기 폐쇄, 나아가 탈핵 로드맵’을 공약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부정할 수 없는 국가사회적 의제로 만들 수 있다. 
 
 ‘막힌 것을 트이게 한다’는 뜻이 소(疏)다. 지금 영남 해변의 한 작은 도시 백성들이 ‘막힌 뜻을 풀어 달라’는 만인소를 발송했다. 수신처는 정부이고 그 수장인 대통령이지만, 실상 전력사회의 편익을 누리면서 먼 시골 바닷가 마을, 원전의 일상적 위협 속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에는 둔감한 모든 이들이 받아야 할 상소다. 수신한 우리 모두가, 이 만인소에 담긴 ‘탈핵의 의지’를 정권에, 정부에 간(諫)하는 사간(司諫)들이 되어야 한다.
 
[살대를 위하여 110]
 

박현철 편집주간 parkhc@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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