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01] 말·글/ 이지누의 우리 땅 밟기 1

이지누의 우리 땅 밟기

“여그선 돌팍이 하나 둘쓱 보이면 꽃 났다고 허고
줄줄이 보이면 금장 보인다고 혀”

- 몽산포 바닷가에서 만난 김의배 옹과 독살.

완당 김정희 옛집 마당엔 벌써 매화 피었습디다.
겨울이 겨울답기도 힘든 모양인지 서울이 겨우 영하 10도쯤 되었다고 무슨 호들갑을 그리도
떠는지 참 꼴불견이다. 대설도 지난 한겨울이 적어도 그만은 해야지 사람도 사람다워 지는
것 아닌가. 중국의 재가 선사(在家 禪師)였던 방온거사는 하늘에서 마음껏 흩날리는 함박눈
을 보고 ‘호설! 편편불락별처’(好雪! 片片不落別處)란다. 눈 내린 날 들판에 나가면 이곳
저곳 분별 없이 어찌 그리도 고르게 쌓였는지..., 함박눈 내리는 꼴이야 가늠할 수 없을 지경
으로 혼란하여 무질서의 극치인 듯 보이지만 어느새 그들은 무심하게 제자리를 찾아 떨어져
어느 곳 한 군데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도 무위(無爲)라 했나 보다. 부러 의식해 보태지는 않았지만 늘 우리들에게 충분
한 것. 그것이 자연일 게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또 그것대로 그들은 늘 우리들에게 충
분한 것일 텐데 추워야 할 즈음에 따뜻해서 좋다고만 하고 있으니..., 얼마 전 다녀온 완당
김정희의 옛집 마당에 벌써 피어 난 매화와 꽃망울 곧 터질 듯이 봉긋했던 목련을 보며 사
람들은 꽃 피었다고 그 앞에서 사진 찍어 대며 좋아들 했지만 되짚어 곰곰 생각해 보면 그
리 좋아만 할 일은 아닌 듯 싶다.
세기말 즐기고 밀레니엄을 팔아 잇속 챙긴, 말 꺼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또 다른
표준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고도 하겠지만 못내 걱정되는 완당 옛집 마당에 피어난 매화
꽃이나 봄인 줄 알고 피었다간 다시 얼어붙어 버린 문경새재의 개나리며 강릉의 진달래를
보며 그 자리에 꼭 들어맞는 다는 것. 거스르지 않으며 제자리에서 ‘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어려운 일인지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새해에는 모두 모두 그 자리 찾아 어
긋나지 않으며 머무를 수 있을까. 글쎄…,

새벽녘, 몽산포 바다에 피어나던
거뭇거뭇한 꽃
이 생각 저 생각 끌어안고 발길 닿는 대로 서붓서붓 나선 걸음이 어느덧 몽산포다. 이곳 사
람들이 몽대(夢垈)라고도 부르는 이 곳까지 찾아 든 것은 김홍도의 풍속도첩을 뒤적이다
「어전(漁箭)」이라는 그림을 본 탓일 게다. 바다에 마치 미로처럼 나무로 책(柵)을 쳐 놓곤
배를 탄 사람들과 책 안에 들어 간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건네고 있고 책 위에는 한가로이
백로가 앉아 있는가 하면 하늘엔 오리인지 한 무리의 새들이 날아가고 있는 한갓진 풍경을
보며 무작정 바다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몸으로 여기 기웃 눈으로 저기 참
견하는 동안 벌써 해질녘이다. 급하지 않게 아예 바다에 마음자리 풀어놓고 몽산포 그 좋은
솔밭으로 깃들어 바다를 즐기기로 한다. 함몰해 가는 해. 해를 보듬는 바다는 참 너르기도
하다. 그 너른 바다를 노을로 물들이는 태양은 또 얼마나 큰 것일까. 한낱 눈에 보이는 그것
만이 전부는 아니리라.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새벽녘 다시 나선 몽산포 바다엔 예나 다름없이 ‘꽃’이 피고 있었다. 바다에 피어나는 거
뭇거뭇한 돌꽃이다. 조금 있으니 ‘금장’이 나고 또 더 기다리니 ‘웃구’가 보이고 마지
막으로 ‘독살’이 났다. 바닷물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물 그득했던 곳에 ‘독살’(石箭)이
생겨 난 것이다. 김홍도의 그림에서 보았던 ‘어전’은 아니지만 그와 똑 같은 기능을 했던
‘석전’이 바로 독살이다. ‘꽃’이 핀다는 것은 바닷물 속에 잠겨 있던 독살의 가장 첫
번째 돌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금장’ 난다는 것은 점점 돌이 많이 보이기 시작해
거뭇한 형태가 보인다는 것, 그리고 ‘웃구’ 난다는 것은 사뭇 형태가 드러나 그 위로 사
람이 걸어다닐 만큼 바닷물이 빠진 상태 그리고 ‘독살’ 났다는 것은 물이 완전히 빠져 살
(箭)의 형태가 완연해졌다는 것이다.

“저 살이 지금 5대째 내려오는 거유.
200년은 족허쥬”
웃구 날 때쯤, 겨울 새벽 견디려 두툼하게 차려 입은 김의배 옹이 늘 그렇듯 쪽받이가 담긴
부게를 메고는 수문통 근처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야 쉽게 알아 볼 터지만 김 옹은 별
반 관심이 없는 듯 수문통에 앉아 물을 보고 있다.
“오랜만에 또 뵙네요”하며 불쑥 인사를 하니 “아이구 이기 누구여, 이 선생 아니유. 워
째 연락도 안 하고 또 이래 왔시유. 아즉도 사진 찍을 것이 남았 남유”하며 얼결에 만난
내가 싫지 않은 모양이다. “어르신은 여전히 건강하시네, 그 때 수술하시고도 계속 독에 나
오셨어요.” “그럼유, 이기 운동이지유. 달리 운동도 못 하는데 이렇게 라도 매일 나오는
거 이기 운동이 되잖여. 안 그러면 또 심심허고….”
김의배 옹은 올해 일흔 다섯이며 몽대에서 태어나 지금껏 이고 이곳 사람들이 ‘적살’이라
고도 부르는 독살의 주인이다. “이 독살이 지금 4대, 아니 나까정 5대여. 옛날 사람들은 오
래 살지 못했어도, 그래도 사오십은 살았지유. 사십이면 진 담뱃대 들고 댕기고 그랬는디 아
무리 짧게 봐도 이 독이 200년은 족허쥬.” “그래도 저게 처음 있던 그대로는 아니죠”
“암요. 무너지면 또 쌓고 우리들도 쌓고 우리 애들도 쌓고 했는디 지금은 높이가 전에만
못혀유. 전에는 내가 독에 들어가면 한참 올려 봐야 허는디 지금은 내 키만 허잖유. 바람에
도 무너지고 물살에도 넘어가고 허물어지면 또 쌓아야 허는디 인자 그것이 잘 안 되는 구만
유. 높이가 전에만 못혀유. 전에는 이 독에 매달려 제법 돈도 되고 그랬는디 일본 사람덜 있
을 때 동력 쓰는 배 나오고 난 담부터는 풍선(風船)이 사라져 버렸잖유. 동력 쓰는 배들은
먼바다 까정 나가 고기를 잡고 그물도 먼바다에 뿌리는디 고기가 이 독살까정 오덜 않지유.
그저 반찬거리나 장만하던지 동네 친구들 허고 술안주 할 정도가 전부여. 해마다 줄어드는
디 그거 보자고 고칠 수는 없잖여…, 쉬운 일도 아닌디….”
그렇다. 전통이라는 것은 늘 돈이 흐르는 곳에는 살아 남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의 그
것은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이 독살 또한 그런 것이다.

“내가 지른 어살에 들어가지 말고
내가 놓은 통발을 들추지 마라”
어전은 어량(漁梁)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조선 영조 28년인 1752년에 제정된 「균역청사목
(均役廳事目)」을 보면 “어로를 따라 대지주를 세워 거기에 섶나무 발을 배열하고 임통을
설치하여 이로써 고기를 받는 것으로 혹은 전양을 차단하고 혹은 반양을 차단한다”라고 되
어 있으며 「시경(詩經)」의 곡풍편(谷風篇)에는 “내가 지른 어살에 들어 가지말고, 내가
놓은 통발을 들추지 마라” 구절이 있다. 앞의 것은 바다에 만든 어전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시경의 그것은 바다에는 어전을, 하천에는 통발을 설치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통발이라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고기잡이의 방식이라면 어전 또한 그것과 다를 바 없으며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그것이 놓이는 자리나 규모에 따라 구분되었다. 어
전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바닷가에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며 통발은 물이 흐르는 길목에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하천에 주로 놓였다. 물길이 없으면 인위적으로 물길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 노릇은 아마 삼십대 이상연배 되는 분들은 한번쯤 모두 해 보았을 일이다. 나
또한 대나무로 성기게 짠 소쿠리 들고 논두렁을 막아 놓곤 발길질로 고기를 몰아 잡곤 했었
으니 그것이 바로 통발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살들은 지역적으로 서로 다르게 불렸는데 같은 돌로 성을 쌓듯이 바다에 담을 둘렀더
라도 제주에서는 갯담, 원 혹은 개라고 하며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에서는 독살이라 불렸다.
또 이들의 분포는 「세종실록지리지」나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전국에 산재해 있던 어전은 모두 360통이었으며 이중 경상도 지역의 7통과 함경도 쪽
의 2통을 뺀 나머지 350여 통의 어전이 모두 들물 날물의 차이가 심한 서해안 지역의 황해
도와 경기도, 충청도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었다.
당시 어전은 왠만한 전답보다도 수입이 좋아 나라에서는 이를 직접 관리하며 조세를 걷었는
가 하면 「경국대전」에는 어전의 사유화를 금하는 법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유명무
실하여 탐관오리들과 권문세가들이 토지 못지 않게 어전을 점탈하려는 경쟁이 치열하였다고
한다. 이를 대변하는 일이 토정 이지함의 일인데 그가 경기도 내륙인 포천의 현감으로 재직
할 당시 척박한 땅에서 나는 산물로는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살지 못하니 포천의 땅과 어전
을 맞바꾸자고 제의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멸 팔아서 새야치 사는 걸
봤단 말이여….”
이들 어전의 쇠퇴는 김의배 옹의 말대로 일제강점기를 정점으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는데 총
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1912년에 1천7백73통이나 되었던 어전이 1942년에는 1천59통으로 급
격히 줄어들었다.
“전에 한 번은 독에 나오는데 저 위에서 보니 독이 번쩍번쩍 혀, 가까이 와서 보는데 독이
전부 멸로 꽉 찼어유. 우리는 그때 내외만 살 때라 먹을 것만 퍼 오고 마을 사람들한테 일
러 줬더니 리어카로 경운기로 트럭으로 수십 대는 퍼 냈을껴. 가오리도 한 번 든 적이 있는
데 그 놈 크기가 어마어마 혀, 부게에 담아도 담기지도 않고 그랬는디 요새는 그런거 구경
도 못 혀, 전에는 여게도 독이 서넛은 되얏는디 이젠 전부 죽은 독이여, 우리 것만 아즉 살
았고..., 아들이 간혹 나서기는 허는디 계속 남을지는 나도 몰러”
전설이란 것이 어디 아주 오랜 옛날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젠 전설이 되고야 말 이
야기. 이십세기에도 알게 모르게 전설은 준비되어 왔고 그것들이 이젠 우리들 앞에 하나씩
태를 갖춘 채 나타나는 것일 게다. 기왕 듣기 시작 한 전설. 조금 더 듣고 일어서자.
“지금 저기 보이쥬, 저 우에 바우 있는데 저게가 고사 지내던 데여. 독살고사를 따로 지냈
는디 음력 팔월 보름 되는 날하고 정월 그믐날하고 일년에 두 번씩은 밤에 시루로 떡 쪄다
가 저 바우 우에 놓고 괴기 많이 들게 해 달라고 고사를 지냈던 기여. 고사는 내가 독살을
맡았을 적에도 서너 번 했는디 그 후로는 하덜 않어유. 전에 어른들 이야기 들으면 독 이
한참 될 때는 저 모래사장에 막을 지어 놓고 독을 지키고 그랬다 허든디. 그 막을 모래 위
에다 막 지었다고 ‘사구막재’라 혔다고 하데요. 우리 독 지키는 막이 두 개나 됐다고 허
니 알만 허지유. 아버지 생존시 까정만 해도 말도 못허게 독에 괴기가 꽉 찼었는디 내가 본
거는 멸 팔아서 새야치 사는 걸 봤지유. 하루 밤에 독에 든 멸치 팔아 송아지를 사니 그기
괴기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허것지유.”
오늘은 이곳에서 ‘몰치’라 부르는 숭어 새끼만 대 여섯 마리 들었다. 그만하고 그이네 집
으로 가서 라면 끓여 훌훌 밥 말아먹고 김의배 옹과 헤어졌다. 하루 들어 다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 다시 들리겠노라고
했다. 어찌 이백 년 세월을 안고 있는 독살의 이야기를 하루에 가늠할 수 있겠는가. 날 더러
잘 가라고 하곤 미처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먼저 마실간다며 뒷짐진 채 길 나서는 그이는
마치 자연을 닮았다. 고기가 들면 드는 대로 들지 않으면 또 그것대로 무덤덤하지만 늘 자
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 보였다. 그 자리가 아무리 소박한 자리일지라도 말이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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