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의 창을 만드는 사람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김소운 선생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의 한 구절입니다. 이 경구가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절대적인 증거로 등극한 지는 꽤 오래됩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최고의 빈곤율을 보인다는 요즘, 맨밥에 간장 한 종지는 절망의 가계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30개국 가운데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0위입니다. 그렇지만 빈곤율은 24위로 쳐지고 빈곤인구를 구제할 사회적 공공지출은 30위로 꼴찌입니다(OECD 2009 통계연보). 경제력에 비해 가난한 이들이 많고 사회가 그들을 돕지도 않는 나라인 것입니다. 소득이 중위권 가정의 반 이하인 가정을 상대빈곤층이라 하는데 그 비율도 외환위기 이후 최고라 합니다. 이들 속에 180만 명이 넘는 빈곤층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급식비까지 손을 대 강을 죽이는 사업에 쏟아 붓는 정부의 치하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작년 4월 정부는, 새로이 빈곤층으로  입한 이들을 ‘신빈곤층’이라는 용어로 부르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신빈곤층이 마치 정부의 실책 때문에 생긴 듯 들린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정부를 견디며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의 지갑까지 털어낸 혈세를 좀 제대로 쓰라고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전에 이웃들의 밥상과 주거를 돌보고 얇은 옷섶을 우리가 여며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을 ‘나라니까 못하지, 이웃들은 할 수 있다.’로 들어야 우리는 사람 사는 세상의 구성원이지 않겠습니까?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라는 햇반류 상품이 있습니다. 시장통 사람들을 좌절시키는 대형마트의 하나인 이마트의 자체 브랜드 상품인데 밥맛은 별로라는 중평입니다. 밥맛 없는 밥처럼 밥맛인 건 세상에 또 없습니다. 그런데 빈곤보다 더 괴로운 게 상대빈곤이듯이 반찬의 상대빈곤처럼 밥맛 떨어지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트리플 A급 한우고기 반찬이 아니면 젓갈도 들지 않는 있는 집 아이들과 비교할 때, 김장조차 할 수 없는 빈곤층 가정의 아이들이 먹어야 하는 ‘걸인의 찬’은 그들의 이웃인 우리들의 보살심을 향한 고발장입니다.


환경운동연합이 세운 에코생협은 ‘밥상 위에 생명을 차리자!’는 모토를 가진 생활협동조합입니다. 건강한 유기농 먹을거리를 유통시켜 생산자 농민과 농업을 돕고 건강한 식품을 도시의 소비자 조합원들에게 공급하는 것이 주요 임무입니다. 에코생협 본점과 환경운동연합 사무국은 서울시 종로구 누하동에 위치합니다. 위치를 언급한 건 돌볼 이웃들의 소재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이웃을 돌볼 보살심의 의무는 매한가지입니다. 특별히 국가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는 나라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난해 12월 9일 에코생협과 환경운동연합이 유기농 배추 삼백 포기로 김장을 담갔습니다. 에코생협 조합원, 환경운동연합 회원과 임원·활동가, 여성위원회 위원들 서른 분이 환경센터 느티나무 아래 모여 왁자그르르 떠들썩한 김장 담그기를 했습니다. 


국가와 기업의 생태적 무지와 비윤리를 고발하는 투사일 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의 밥상을, 밥상 위의 찬을 걱정하는 따끈한 마음도 있다고 내세우고 싶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덜지 않으면 마음 불편하여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할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남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을 보살심이라 부른다 합니다. 보살들의 ‘사랑의 유기농 김장 담그기’는 시종 웃음과 수다의 한마당이었습니다. 삼백 포기 유기농 김장 김치를 담가 하루를 재워 풋기를 뺀 뒤 환경센터 인근의 독거노인·소년소녀가장·극빈 가정 등에 나눠 드렸습니다. 


매년 연말, 환경센터 마당에서 김장 잔치가 열립니다. 시대의 추위를 녹이는 ‘드리는 기쁨’이 피어납니다. 올해 연말에는 시간 내서 느티나무 아래로 ‘왕후의 찬’을 만들러 오시기 바랍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글·사진 박현철 편집주간  parkhc@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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