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4월호] 나의제언

나의 제언

환경문제를 초래하는 문화,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
조경만/목포대 생태인류학 교수

10여년 전 경기도 안성 청룡사의 한 스님으로부터 ‘물이 차야 배가 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배는 물이 차올라야 움직일 수 있다. 여기서 물
이라는 말은 자연환경이라는 말로도 문화라는 말로도 새겨볼 수 있다. 마치 배가 물
이 차올라야 뜨듯이 자연환경의 끊임없는 순환과 균형과 자체 발전이 있어야 그 안
에 들어 있는 생물, 무생물의 생리활동과 진화가 가능해진다. 사람들의 활동도 마찬
가지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그 일을 떠받쳐 주는, 마치 물과 같은 자연
환경의 힘이 있어야 한다. 문화 역시 물과 같이 일을 떠받쳐주는 힘이다. 어떻게 일
을 할 것인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그 조건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문화이다.
조금 이야기가 복잡해지겠지만 여기에서 논의를 더 진전시켜 오늘날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환경운동, 환경친화적인 발전에 관한 이야기로 방향을 좁혀 보자. 이러한 것
들도 역시 인간의 ‘일’이다. 이 ‘일’에서도 역시 문화라는 물이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 된다. 환경운동이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연환경뿐 아니라 이의 문제를
초래하게 된 인간의 문화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또한 자연환경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제대로 뜨고 순조롭게 항해하도록 문화라는 물에서 물길을 잘 찾아야 한다. 오
늘 이야기는 자연환경의 문제를 초래하는 문화, 환경운동의 문화에 관한 것이다.
자연환경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문화의 문제이다. 인류가 발생한 이래 지금까지 사
람들은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문화를 만들어 왔다. 그런데 인간의 독자적
생성물인 이 문화가 점점 자연환경의 수용능력을 넘어서 자원을 고갈시키고, 자연환
경의 자율적 균형유지 기능을 파괴할 부산물을 자연에 되쏟아 버리는 틀을 갖추게
되었다. 생산시설과 사회간접자본을 설치하는 사람들이나 생산활동을 하는 사람들,
소비생활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연환경과 인간생활을 대립적인 것것으로 만들고
자연의 착취와 오염을 댓가로 얻는 인간생활의 틀에 익숙해져 버렸다. 아무리 자연
과학적으로 오염의 수치를 제시하고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
에게는 한 때의 충격일 뿐이고 곧 그간 익숙한 생산과 소비의 패턴, 자연환경에 대
해 아랑곳없었던 그간의 행위와 사고의 패턴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필자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샴푸가 수질에 미치는 오염력에 대해 크게 놀란다. 그러나 샴푸로 손
쉽게 윤기 있는 머리결만들기가 워낙 큰 관심거리가 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까지만
샴푸를 쓰고 내일부터는 달라져야지’하는 생각을 항상 반복한다. 이는 그나마 강의
가 효력을 발휘한 학생의 경우이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좋은걸 어떡해’라는,
자기 행위와 사고 틀의 견고함을 과시한다.
최근 바다를 막고 갯벌을 간척하겠다는 사람들과 접하다 보니 어떤 이들에게서 ‘귀
머거리 현상’, ‘귀머거리 문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의 말이 들리지 않
는 현상이다. 이 분들이 개발계획을 관철시켜야겠다는 의지가 너무나 강해서 다른
이들의 말에 신경을 쓰지 못한다고 단순화시키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의지, 그것 하나
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의지 뒷편에 존재하는 거대한 문화가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즈음 많이 이야기되듯이 갯벌을 보존하고 생
태계를 잘 살리는 것이 농토를 만드는 것보다 경제적 이익이 크다는 점을 제시하고,
앞으로 갯벌과 리아스식 해안의 경관 가치도 높아질 것이라 제시하면 이 점을 인정
하지 않더라도 듣기는 해야 할 터인데 답변이 전혀 다른 분야에 관련된 것으로 제기
되곤 한다. 한쪽 편이 제시한 내용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여전히 이 분들이 갖고 있
었던 ‘발전’에 대한 견해가 되풀이된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많다.
인구를 부양하려면 간척밖에는 방법이 없다’, ‘국민소득이 현저하게 올라갈 때까
지는 공단을 만들고 무역을 하는 길밖에 없다. 환경문제 해결은 그 후의 일이다’,
‘기존의 유실된 농토는 값비싼 땅들이다. 누가 그곳에서 농사지으려 하겠는가. 새로
운 땅을 위해 간척하는 수밖에 없다’. 이 불가피론에다 간척 후의 발전상에 대한
청사진이 수반되는 과정이 이야기 석상의 모든 논점에서 반복된다.
간척을 반대한 이들은 과연 갯벌을 활용하는 것보다 공단을 만드는 것이 오늘날 국
민소득 증대에 더 나은 길인가에 대해 의문를 제기하고 갯벌의 경제적 가치를 논한
것인데, 이에 대한 대답은 없고 똑같은 논법이 반복된다. 농지 확보의 필연성을 주장
하면서도 또다시 그렇게 만든 농지가 타용도로 전환될 위험성에 대해서는 시장경제
적 불가피론을 앞세우는, 자가당착을 반복한다. 더욱 더 심각한 것은 이 분들의 계획
에 대한 반대의견을 무조건적 ‘보존’의 완고함으로 규정해 버리는 현상이다. 이
분들이 느끼기에 반대론자들은 ‘귀머거리다. ‘보다 나은 발전, 지속적 미래를 위한
발전’이 방조제 건설과 간척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발전에 대한 발상의 전
환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음에도 그 의견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서
이는 ‘보존론자’의 입장이라는 것으로 일축해 버린다. 한쪽은 발전 혹은 개발이고
다른 한쪽은 보존으로 이분화된다. 이렇게 규정된 ‘보존론자’들은 이 분들이 보기
에 귀머거리다. 이 분들은 간척을 반대하는 수많은 주민들이 아직 발전의 맛을 모르
는, 깨우쳐지지 않은, 안타까운 사람들이라는 평언들도 한다.
방조제 건설과 간척을 추진하는 이들 간에, 혹은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 자체
조직의 운명을 좌우하는 어떤 정치경제적 요인이 작용하는지, 어떤 음모이론적인 상
황이 존재하는지는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없다. 분명한 것은 귀머거리 문화가 있다
는 점이다. 한쪽 편이 그간의 개발 과정과 논리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방조제의 건설
과 간척으로 사고와 행위가 틀지워져 있고 다른 말들은 그 틀에서 배제되어 버리거
나 인지조차 되지 않는 귀머거리 문화이다. 혹은 이 분들이 인식하듯이 반대론을 펴
는 사람들에게도 그간 익숙해져 온 자기 사고와 행위의 틀이 다른 말을 아예 배제하
고 마는 귀머거리 문화가 조성되어 있지나 않은지 경계할 일이다.
이 이야기들은 환경문제의 해결, 환경친화적 발전의 추진이 오로지 자연과학적 과제,
경제학적 과제에 그치는 게 아님을 말해주는 한 예다.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익숙
해져 있는 문화, 자신은 그 존재를 느끼지 않기에 스스로 성찰하고 비판해 볼 여지
조차 갖지 않지만 의사결정을 하고 태도를 취하는 데 작용하는 문화를 제대로 직시
하고 혁신시켜야 할 과제가 있는 것이다. 자연환경의 문제는 곧 문화의 문제이고 자
연환경 문제의 해결 역시 문화의 문제 해결에 달려 있다는 말이 그래서 성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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