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7월호] 환경과 사람/ 행주성당 두봉주교

환경과 사람/행주성당 두봉 주교
가난한 사람들 곁에 그가 있었다
황숙희/본지기자

예전에 중국 시인 두보(杜甫)는 그의 시 「곡강(曲江)」에서 사람 나이 칠십은 예
로부터 드문 일이라 하여 칠십의 나이를 고희(古稀)라 했다. 물론 당시는 의료기
술이 발달하지 않아 오래 사는 사람이 드물기도 해서였겠지만 그 정도 세월의 두
께면 무언가 각별한 삶의 궤적이 있다는 말이 함축되어 있기도 할 것이다.
젊은 사람은 젊다는 그 이유만으로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희망과 절망을 수
도 없이 겪게 되고 나이든 사람은 돌아 나온 그들 삶의 회한과 남겨진 죽음으로
부터 오는 두려움에 조금씩은 위태로운 삶을 꾸려간다. 정작 드문 생이라는 ‘고
희’의 나이에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그것도 이국땅에서 대부분을 보낸 평
범한 일상인이 아닌 성직자라면.
행주산성 아래 아직은 시골 풍경이 남아 있는 조그마한 마을 중심에 9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성당이 있고 바로 옆에는 소박한 조립식 건물이 한 채 있다. ‘인간
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성직자’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한국인의 벗’으로 알
려진 두봉(杜峰) 주교가 거처하는 곳이다. 환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채우고 “어
서오세요”라며 큰소리로 방문자를 반기는 두봉 주교에게서 근엄한 성직자의 모
습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네 이웃집의 정 많은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농군 차림의 신부님
한국땅에서 44년을 신부와 주교로 있으면서 그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해왔다. 많은 세월을 농촌 교구에서 농민들과 함께 보내며 한국교회농민사
목의 대부로서의 그의 삶은 농촌의 농민들 속에 서 있다.
농민들과 함께 한 그의 소박한 삶 때문에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안동교구장 시
절 두봉 주교는 교구청에서도 텃밭을 일구거나 주변 나무가지 치는 일을 즐겨했
다. 그런데 교구청을 방문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두 주교의 모습 때문에 자
그마한 키의 농군 차림의 그를 교구청 일꾼으로 착각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
다. 바쁜 틈틈이 짬을 내 손수 이것 저것 일하는 습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고장난 기계를 고치고 화초를 가꾸는 일 등은 지금도 두 주교에게는 즐거운 노동
이다.
“부모님이 모두 평범한 농민이었어요. 농촌에서의 생활이 어떤 것인 줄 알죠. 지
금도 농민들이 무슨 농사를 어떻게 짓나 관심이 많아요.”
농촌교구인 안동교구에서 농민들과 잘 어울리고 그들 속에 뿌리박을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는 1929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오를레앙에서 5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부모를 여윈 사촌 동생 2명을 포함해 7남매의 대가족 분위기에서 자랐는데 부모
님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원으로 더 어려운 이웃을
늘 생각하고 도왔다. 부모님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며 삼촌이 신부였던 터라
그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두 주교는 자연스럽게 성소의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사제의 꿈을 키워온 그는 오를레앙 교구 신학교를 다니면서 사
제의 길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제 성소에 회의를 느꼈다거나 그만두고 싶었
다는 얘기가 아니다. 교구 본당에 있는 신부보다는 하느님 말씀을 접해보지 못하
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그들 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때
문이었다. 그래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노동사제가 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
군입대를 자원했다. 그곳 부대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생을 만나 외국 선교에
대한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된다. 파리외방전교회는 3백년전 천주교 포교를 식민지
침략전쟁과 동시에 폄으로써 결과적으로 종교를 식민지배의 도구로 사용했던 스
페인과 포르투갈의 포교방식에 맞서 교황청이 만든 선교단체이다.
제대 후 학교를 파리외방전교회로 옮긴 그는 1953년 사제서품을 받고 그 이듬해
한국에 오게 된다.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이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인해 폐
허가 되어 있었다. 굳이 힘들고 고생스런 이곳으로 왜 오게 되었느냐고 묻자 빙
그레 웃으며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겠냐고 낮게 말한다. 그도 10살 때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독일군을 피해 피난도 가보고 전쟁의 고통을 맛보았기 때문에 당시 한
국민들의 삶은 생소하고 낯선 것이라기 보다는 그가 함께 느끼고 겪어야 하는 삶
으로 느꼈다고 한다.

가난하고 낮은 교회
두봉 주교는 69년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안동교구청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주교도 교구장직도 맡을 수 없다” “한국 교회는 한국인 손으로 운영해
야 한다”고 하며 계속 고사하다가 결국 주교서품을 받고 안동교구장으로 왔다.
‘가난하고 낮은 교회, 작은 교구’를 지향하는 그는 교구장으로서 별도의 비서
를 두지 않았고 사람들이 면담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기꺼이 응했다. 지역주민 대
다수가 농민으로 구성된 안동교구를 21년간 이끌면서 농민회 운동을 도입, 카톨
릭농민회를 만들어 농민들이 스스로 자립기반을 가질 수 있도록 했으며 농협민주
화, 농산물 제값받기운동 등 농민의 아픔을 대변하고 함께 나누어 왔다. 또 한때
농민사목부를 따로 운영하면서 한국교회농민사목의 대부로 큰 궤적을 남겼다.
더불어 그는 지역의 교육과 문화발전에도 혼신의 힘을 쏟았는데, 교육시설이 많
지 않았던 당시 안동 지역에 상지전문대와 상지여·중고를 세우고 불우한 학생
들을 위해 학생회관을, 혼자 공부하는 독학생을 위해서 마리스타 야간학교를 잇
따라 마련해 청소년 교육에 애를 썼다. 모두가 기피하는 나환자들을 위해 다미안
의원을 열어 그들이 마음껏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양로원, 각종 장
애인 재활기관 등을 건립, 후원하는 등 소외받고 가난한 사람들 곁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 지역주민과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
그가 항상 꿈꾸는 낮은 데로 임하는 열린 교회를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그들의
삶이 좀더 나아지고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과 기쁨을 찾아가는 것을 볼 때면 그는
그것이 행복이고 축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삶에서 예기치 못한 고통도 뒤
따랐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9년 ‘오원춘 사건’ 때문에 한국정부로부터 강제
추방의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함께 오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농민들, 주민들과 함께 울
고 웃으며 자그마한 공동체를 꾸려가면서 행복과 기쁨을 느낀 것이 좋은 일이었
다면 그것 때문에 추방 명령을 받은 것은 나쁜 일이었지요. 그들과 함께 한 삶
속에서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었습니다.”
지나온 두 주교의 삶 속에 등장하는 것은 온통 농민이나 나환자 장애인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 속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그가 있다.
“교황청에 다녀온 뒤 강제 추방령이 취소되자 바로 10.26이 터지고 유신정권이
무너졌습니다.” 작달막한 체구의 환한 웃음을 짓는 그 어디에 한국교회와 사회
민주화를 위해 싸운 ‘무서운 치열함’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터뷰
가 끝나갈 무렵에는 종교적 신념에서 나오는 그 꿋꿋한 내면의 힘이 느껴졌다.
그렇게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으로서 21년 동안 안동교구를 이끌면서도 임명되는
그날부터 4차례에 걸친 사임요청으로 결국 지난 90년 10월 한국인 주교에게 자리
를 물려주게 된다. 그리고 지금 거처하는 행주산성 기슭 행주성당에 오게 된 것
이다.

우리네 할아버지같은 주교님
건네주는 명함을 보니 그의 프랑스 이름은 레네 뒤퐁(Rene Depont)인데 어째 두
봉이라는 한국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다. 예전에 그가 대전교구 대흥동본당 오기
선 주임신부의 보좌로 있을 때 오 신부가 그의 본래 이름과 가깝게 지어줬다고
하는데, ‘산봉우리에서 노래 부르는 두견새’라고 풀이해준다. 유창한 한국말과
우리네 할아버지 같은 정겨운 느낌으로 이름풀이를 해주는 그를 보며 눈이 푸르
긴 하지만 왜 그를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사람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는 듯 하
다.
방 한 켠에는 책꽂이에 다 꼽지 못한 책들이 잔뜩 쌓여 있다. 읽으려고 구해다
놓았는데 바빠서 틈이 잘 안나 다 못 읽고 있다고 했다. 고희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두 주교의 일과는 꽉 짜여져 있다. 인터뷰 시간도 안나서 오후 다섯시가
훨씬 지나서야 잡았으니 말이다. 한달에 보름 정도는 바깥에 나가 성직자, 수도
자, 신학생 피정을 지도하거나 강연을 한다. 나머지 보름은 파리외방전교회 지부
장으로서의 역할과 이곳 신도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 한국교회의 대외적인 활동
에도 소리없이 참여하고 있다. 요즘에는 9월쯤에 본국에 잠깐 다녀올 예정이라
미리 일을 해놓느라고 더 바쁘다고 한다.
지난 겨울에는 그간의 삶의 자취를 모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기쁨』이라는
에세이집을 냈다. 세련된 미사여구보다는 솔직하고 투박한 글들이 오히려 진한
삶의 감동을 일깨운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아니고 삶이 감동적인 사
람도 아니지만 보잘것 없는 이글이 잠못 이루어 뒤척이는 어느 한 사람에게라도
위안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서문에서 드러내지는 않지만 빛이 나는 그의 삶
의 면모가 보여진다.
“양심의 소리를 제대로 듣고 산다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어요. 돈이 문
제가 아니지요. 정치가든 기업가든 양심을 누르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하니 부정과
부패가 오는 거예요. 양심의 소리를 제대로 듣는 사람에게 마음의 평온과 행복이
옵니다.”
평생을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의 이름으로 한국을 사랑했던 두봉 주
교는 오늘도 행주산성 기슭에서 세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3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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