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01] 도심의 너구리

도심의 너구리
황숙희/본지기자

얼마전 강남 한복판에 너구리가 출현해 사람들의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너구리가
나타난 곳은 서울 강남구 대치3동 쌍용아파트 양재천 부근. 너구리를 봤다는 주민
들 신고에 따라 일대를 조사해본 결과 너구리 가족으로 보이는 5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지역은 인근 대모산이나 구룡산과도 상당히 떨어져 있어 너구
리가 서식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로 여겨지고 있는데, 너구리를 본 주민들 얘기
로는 사람을 보면 도망가거나 경계하는 빛이 역력하지만 먹을 것을 놓아 주면 경계
를 조금 늦추고 주위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먹어치운다고 했다.
“처음에는 너구린가 오소린가 했어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고 한 번도 실제로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것도 이런 도시에서요. 그런데 사람을 경계하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놔둔 음식을 먹기도 하고 그 주변을 왔다갔다 하며 자기
들끼리 놀기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쌍용아파트에 산다는 김성주(35세. 주부)씨는 도시에서만 살아온 터라 도시 한가운데
서 너구리를 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한 듯이 말했다.
그 얼마 뒤 대학 캠퍼스에도 너구리가 나타났다. 종로구 명륜동에 위치한 성균관대
학교 학군단 건물 뒷마당에 어미와 새끼 너구리 두 마리가 돌아다닌다는 것. 너구
리를 자주 본 학군단 사람들에 따르면 어두워진 다음에야 나타나서 주변을 어슬렁
거리면서 먹이를 찾거나 놀다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성균관대학교에는 몇 년 전에
도 학교안에서 암수 한쌍의 너구리가 발견돼 화제였었는데 한동안 안보이다가 얼마
전에 어미와 새끼너구리가 발견됐다고 학군단 직원이 말했다.
2년전이기는 하지만 서울의 중심인 종로의 종묘에서도 너구리가 출현해 한 방송사가
종묘를 쏘다니면서 먹이도 구하고 노는 그들의 생활을 밀착취재해 ‘종묘너구리’가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

도시에 살림차린 너구리
낮에는 주로 숲이나 바위 밑, 큰 나무 밑 구멍속에서 자다가 밤이 되면 나와서 활동
하는 너구리는 들쥐나 개구리, 지렁이, 곤충, 과일 등 가리지 않고 먹는 잡식성 동물
이다. 야행성이라 주로 밤에 활동하지만 가끔 낮에도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몸길
이는 50~70cm정도이고 꼬리길이는 10~20cm 정도로, 물을 좋아해 주로 물이 있는 강
가 숲속에 사는 너구리가 이렇게 도심에 자주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도시 주변의 강과 산이 파괴돼 그곳에 먹이가 부족해지자 먹을 것을 찾
아 인근 도심에까지 내려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치동 양재천에 나타난 너구리
들은 인근 청계산에서 내려온 것으로, 그리고 성균관대 너구리는 북한산에 살던 너
구리들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도심의 하천이 너구리들이 서식할만큼
깨끗해지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동물보호연구원측은 “양재천
주변이 깨끗해지고 물고기들이 살 정도로 물이 맑아져 너구리들이 먹이를 찾아 내
려오다가 아예 이곳에 정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콘크리트에 갇히고 하수도쯤으로 치부되던 도시의 하천이 양재천이나 수원천처럼
지역주민들이나 지자체의 노력으로 하나둘씩 제모습을 갖춰가자 너구리들이 찾아들
고 있는 것이다.
하수처리가 잘돼 수질이 나아지고 자연하천형으로 만들어 습지가 조성되면서 이들
이 인근 산에서 하천을 따라 이주해오고 있는 것이다.
너구리가 출현하는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처음에는 사람만 보면 달아나던 녀석
들이 먹이를 주고 친근함을 보이자 무서워하지도 않고 먹이를 받아먹고 심지어 재롱
을 피우기도 한다며 그들에게는 새로운 저녁 어스름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강남구청
은 양재천 부근에 너구리가 서식하는게 확인되자 그 주변을 ‘생태계특별보존지역’
으로 지정해 보호할 방침에 있다고 한다.

너구리의 결정
사람도 살기 팍팍한 이 도시에 야생동물인 너구리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고 경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이 그들의 몫을, 그들의 영역을 빼앗지 않고 그들이 살 만큼의 서식
환경을 유지할 때까지 그들은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종묘 숲속에 보금자리를 마련
하고 살던 종묘너구리는 작년 1월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종묘숲의 들쥐나 개
구리, 사람들이 버리고 간 음식찌꺼기를 뒤져먹으며 새끼도 낳아 도심에서의 생활
에 적응한 것으로 보였던 너구리가 어느 때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고 종묘관리소측
이 밝혔다. 촬영을 위해 몰래 카메라와 같은 낯선 장비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
자 위협을 느낀 너구리가 다시 북한산으로 들어갔거나 딴 곳으로 거취를 옮긴 것 같
다고 동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지금은 너구리가 겨울잠을 잘 시기이다. 개과에 속한 동물중 유일하게 동면을 하는
너구리는 11월에서 2월까지 겨울잠을 잔다. 겨울잠에서 깨, 올 봄에 다시 예의 그곳
에 나타날지 아니면 고단한 도심에서의 살림을 정리하고 다시 산으로 돌아갈지는 너
구리가 결정할 일이다.
하지만 그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초조할지 모른다. 너구리가 나타나 좋아했던 마
음은 한편으로는 산에서나 볼 수 있는 너구리를 도심에서 보는 마냥 신기한 마음이
기도 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이곳이 아직은 살만한 곳이구나 하는 안도
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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