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 사진이 있는 엽서·이지누

곰배령 고개마루에서


만고장공(萬古長空)에 일조풍월(一朝風月)입니다. 모든 것은 공(空), 그 속에 있기 마련입니다.
숭혜선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중국 안휘성 잠산현 천주산으로 들어가 초막을 짓
고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막 곁을 지나던 중이 불쑥 그에게 물었습니다.
“달마가 중국에 오기 전에도 이 땅에 불법이 있었습니까” 그러자 숭혜는 “그가 인도에서 이곳
으로 온 것을 들추지 말고 오히려 지금 당장의 일은 무엇인가” 합니다. 그러자 중이 하는 말,
“저는 모르겠으니 선사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숭혜는 “만고에 변함없는 허공이요, 하루아침
풍월이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아직 찬기 가시지 않은 바람 휑휑한 곰배령을 오르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말의 무게에 짓눌
려 있습니다. 끝끝내 변하지 않는 허공, 만고장공은 본질이고 바람불고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것
은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어느덧 고개마루까지입니다. 그 말 되새기는데 볕이 따사롭습니
다. 봄볕입니다. 볕을 따라 둘레둘레 고개를 돌리다가 눈 녹은 땅에 서둘러 피어난 복수초를 만
났습니다.
어여쁘기 짝이 없는 여린 노란색입니다. 볕을 향해 잎을 활짝 열어 제낀 그는 봄이 왔음을 알리
고 있는 것입니다. 물끄러미 그를 보며 생각합니다. 이때껏 꽃이 피는 것만 좋아하고 꽃이 필
수 있도록 땅을 가꾸는 것에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꽃은 일조풍월이고 땅은 만고장공일
텐데 아무래도 저는 땅보다는 꽃에 더 기울었지 싶습니다. 꽃을 즐기기는 했으되 땅은 돌보지 않
았고 새로 돋는 나뭇잎을 어여뻐 했으되 땅은 가꾸지 않았던 것입니다. 땅이 비를 머금어야 꽃
이 피어남을 땅이 넉넉해야 꽃 또한 넉넉하게 피어나는 것임을 알면서도 소홀했습니다. 봄은 꽃
이 아니라 땅임에도 이처럼 잘못을 저지르고 삽니다. 사람인 탓입니다. 하지만 다행한 것은 사람
이기에 그것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대할 때 좀 더 본질에 가깝게 다가가야겠다
는 생각, 여린 복수초와 따사로운 볕에서 얻은 귀한 생각입니다.

이지누 www.leejinu.com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12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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